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창5:25)

 

AC.524

 

이 교회의 어떠함(quality)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퍼셉션의 능력이 일반적이고 흐릿하였다는 점은 ‘노아’라 하는 교회에 대한 설명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완전성(perfection)은 감소하였고, 그와 함께 지혜와 지성도 감소하였습니다. Nothing is mentioned concerning the quality of this church; but that its perceptive faculty was general and obscure, is evident from the description of the church called “Noah”; so that perfection decreased, and with perfection wisdom and intelligence.

 

 

해설

 

이 문장은 매우 짧지만, 태고교회 전체의 흐름을 정리하는 ‘결정적인 평가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일부러 이 교회의 ‘구체적 성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설명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그 상태가 다음 교회인 ‘노아’를 통해 충분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교회는 독자적인 특징을 논할 만큼의 고유한 생명력을 지니지 못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이에요.

 

앞선 교회들에서는 각 이름마다 퍼셉션의 미묘한 차이가 비교적 상세히 다루어졌습니다. 어떤 교회는 더 천적이었고, 어떤 교회는 퍼셉션이 보다 일반화되었으며, 어떤 교회는 교리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구분조차 생략됩니다. 이는 퍼셉션이 이미 충분히 약화되어, 더 이상 미세한 차이를 논할 단계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퍼셉션을 ‘일반적이고 흐릿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일반적’이라는 말은, 분별이 넓은 범주로만 작동하고, 더 이상 구체적인 상황과 상태를 세밀하게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흐릿하다’는 것은 선과 진리가 분명히 보이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진 것은 아니지만, 빛이 직접적으로 비추는 상태도 아닙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말하면, 이는 ‘하나님의 뜻을 즉각적으로 아는 상태’가 아니라, ‘대략적인 방향만 짐작하는 상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이 문장에서 중요한 연결 고리는 ‘노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성격을 직접 설명하는 대신, ‘노아 교회’를 통해 거꾸로 그 상태를 이해하라고 안내합니다. 이는 태고교회의 마지막 단계들이 이미 다음 시대의 교회 방식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즉, 이 시점에서 태고교회는 더 이상 완전히 태고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새로운 교회로 넘어간 것도 아닌, 어중간한 지점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완전성의 감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전성은 도덕적 완전함이나 윤리적 흠결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퍼셉션의 선명함, 즉 선과 진리를 직접 인식하는 능력의 완전성을 뜻합니다. 퍼셉션이 약해질수록, 교회는 점점 더 외적인 방식에 의존하게 되고, 그만큼 내적인 생명은 줄어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완전성의 감소와 함께 ‘지혜와 지성의 감소’를 나란히 언급합니다. 지혜는 선에 대한 인식이고, 지성은 진리에 대한 이해입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에는 이 둘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작동합니다. 그러나 퍼셉션이 흐릿해질수록, 지혜는 감각적인 선이나 전통적인 선으로 바뀌고, 지성은 추론과 기억에 의존하는 이해로 바뀝니다. 이는 능력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인식의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에 생기는 변화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태고교회의 끝이 단순한 몰락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인식 방식이 바뀌는 전환’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퍼셉션이 줄어들수록, 인간은 더 많은 설명과 규범과 제도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이것은 실패라기보다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용된 새로운 단계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조용하지만 무겁습니다. 태고교회는 여기서 사실상 막을 내리고, 이후 인류는 더 이상 ‘즉각적으로 아는 교회’가 아니라 ‘배워서 아는 교회’로 들어가게 됩니다. ‘노아’는 그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이름이며, 이 교회는 그 문 앞에 서 있는 마지막 태고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보면, AC.524는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창세기 5장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정리 문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AC.525, 창5:26-27,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6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Methuselah lived after he begat Lamech seven hundred eighty and two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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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3, 창5: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AC.523-524)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And Methuselah lived a hundred eighty and seven years, and begat Lamech. (창5:25) AC.523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라멕’(Lamech)은 아홉 번째 교회를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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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And Methuselah lived a hundred eighty and seven years, and begat Lamech. (창5:25)

 

AC.523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라멕’(Lamech)은 아홉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Methuselah” is signified an eighth church, and by “Lamech” a ninth.

 

 

해설

 

이 짧은 문장은 단순한 계보 설명처럼 보이지만, 창세기 5장을 관통하는 중요한 전환점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도 인명으로 보이는 이름들을 개인이 아니라 ‘교회 상태’로 읽어야 한다는 원칙을 유지합니다. ‘므두셀라’와 ‘라멕’은 각각 독립된 인물의 생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말기에 이르러 점점 달라져 가는 영적 상태의 연속을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앞서 ‘사람’(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으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이미 퍼셉션은 점차 희미해지고, 직접적인 인식보다는 더 일반적이고 외적인 형태로 이동해 왔습니다. ‘므두셀라’와 ‘라멕’은 바로 그 흐름이 더욱 진행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전히 태고교회 계열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그 생명력과 즉각성은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므두셀라’가 여덟 번째 교회로 언급된다는 것은, 교회의 연속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고, 주님과의 연결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연결은 점점 더 길어지고, 느슨해지며, 직접적인 퍼셉션보다는 전해진 것, 보존된 것, 기억된 것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집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말하면, 이는 ‘살아 있는 분별’이 아니라 ‘아직은 붙들고 있는 신앙의 잔향’에 가까운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좀 미안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비유하자면, ‘생명 연장 장치로 의학적 수명만 유지하는 상태’에 가깝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어지는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로 소개됩니다. 숫자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 시점이 태고교회의 말기라는 점은 분명해집니다. ‘라멕’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이후 곧바로 ‘노아’가 이어진다는 점을 떠올리면, 여기서 말하는 상태는 이미 큰 전환을 앞둔 긴장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퍼셉션은 거의 사라졌고, 교회는 더 이상 내부의 빛으로 움직이지 못한 채 외적 질서와 보존된 가르침에 의존하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이제 곧 그 장치를 뗄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과정을 ‘타락’이나 ‘실패’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류 전체의 상태 변화이며,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용된 흐름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지는 대신, 이후 인류는 교리, 규범, 제도, 법, 문자에 의존해 살아가게 됩니다. ‘므두셀라’와 ‘라멕’은 바로 그 문턱에 서 있는 교회 상태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이 한 문장은 단순히 ‘여덟 번째, 아홉 번째’라는 정보를 주고 있는 게 다가 아니라, 태고교회가 끝을 향해 가고 있으며, 곧 전혀 다른 방식의 교회 시대가 열릴 것임을 조용히 예고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가 지루한 연대기가 아니라, 인류 영적 상태의 미세한 이동을 기록한 장이라는 사실이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분명해집니다.

 

 

 

AC.524, 창5:25, ‘퍼셉션 관련, 연명 단계에 접어든 교회들’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창5:25) AC.524 이 교회의 어떠함(quality)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퍼셉션의 능력이 일반적이고 흐릿하였다는 점은 ‘노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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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2, 창5:23-24, ‘에녹’(Enoch)이라는 사람들의 퍼셉션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2 ‘에녹’(Enoch)이라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퍼셉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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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창세기 5장 세 번째 시간, 21절로 24절이며, AC 글 번호로는 516번에서 522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1-24)

 

 

이 본문을

 

에녹, 퍼셉션을 교리로 보존한 사람들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대한 속뜻 요약입니다.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는 신앙에 관한 교리를, ‘자녀들을 낳았으며’(begat sons and daughters)는 진리와 선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는 그 기간이 매우 짧았음(few)을 의미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walking with God)는 앞에서와 같이 신앙에 관한 교리(doctrine concerning faith)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는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하여 보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상과 같은 속뜻 요약에서 핵심은 ‘퍼셉션(perception)의 시대였던 태고교회에서 왜 갑자기 교리 얘기가 나오는가 하는 것’이며, 이걸 이해하려면 그렇다면, ‘퍼셉션이란 무엇인가’ 하는 더욱 근본적인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다음은 며칠 전 제가 블로그에 올린 글인데 이해를 돕기 위해 인용합니다.

 

 

아래는 AC.521(23-24절) 해설 중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for they enter into the most minute and particular things, with all variety according to states and circumstances),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라는 문장에 대한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개념적 이해나 논리적 판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식입니다. 그것은 정보를 모아 분석한 결과도 아니고, 규칙을 적용해 도출한 결론도 아닙니다. 퍼셉션은 선과 진리를 직접 감지하고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인식으로, 생각이 작동하기 이전에 이미 방향이 주어지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배우는 대상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며, 설명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로 작동합니다. 마치 아이가 어느 순간 엄마의 얼굴 표정을 보고, 속으로 ‘아, 엄마가 지금 힘들어하시는구나...’ 엄마의 상태를 즉각적으로 아는 것과 비슷합니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이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미세하다’(the most minute)라는 표현은 퍼셉션이 불분명하거나 흐릿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퍼셉션은 너무 정밀해서 일반적인 언어로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퍼셉션은 어떤 상황을 볼 때, 그 상황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분리하지 않고 한꺼번에 인식합니다.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 듣는 사람의 준비 정도, 관계의 맥락, 시기의 적절성, 그리고 그 선택이 불러올 결과까지가 동시에 감지되는 식입니다. 이 모든 요소가 하나의 인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퍼셉션은 매우 정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퍼셉션은 항상 개별적으로 작동합니다. 같은 말, 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퍼셉션은 그것을 상황마다 다르게 인식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선이 되지만, 다른 경우에는 침묵하는 것이 선이 됩니다. 이 차이는 원칙을 어긴 결과가 아니라, 상태, 곧 상황이,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분별의 차이입니다. 퍼셉션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상태’를 기준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판단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퍼셉션은 교리와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교리는 전달되기 위해 반드시 일반화를 필요로 합니다. ‘항상’, ‘대체로’, ‘원칙적으로’와 같은 표현이 없으면 교리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경우를 하나의 틀로 묶어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이러한 일반화 자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언제나 이번 경우를 보고, 지금 상태를 봅니다. 비유하자면, 시력 차이요, 해상도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높으면 사물이, 화면이 또렷하고 생생하게 보이지만, 낮으면 흐릿하게 무난하게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된다고 말합니다. 언어는 필연적으로 경계를 긋고, 흐름을 멈추고, 판단을 고정합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흐르며, 상태에 따라 달라지며, 살아 움직입니다. 살아 있는 분별을 문장이나 규칙으로 붙잡아 두려는 순간, 우리는 그 생명 대신 틀만 붙잡게 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는 사랑의 퍼셉션은 그 모든 정황 및 그 마음속 동기까지 보지만 일반화된 규범인 교리는 그런 걸 다 놓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든 사고의 비유는 이 점을 매우 잘 보여 줍니다.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에게 사고의 규칙을 가르치면, 오히려 사고의 자유로움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사고능력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외적인 규칙에 매이면서 내적 판단이 위축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영재를 일반 학교에 보낼 경우, 많은 경우 아이를 망치는 것과도 같은데요, 퍼셉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내적인 빛으로 알고 있는 것을 규칙으로 다시 배우게 하면, 그 인식은 점차 경직됩니다. 내면이 열려 매 순간 하늘의 빛으로 즉시 알면 되는 것을 굳이 자기들이 정한 어떤 룰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천적인 사람의 퍼셉션은 묘사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흐릿하거나 불분명해서가 아니라, 너무 구체적이고 상황 의존적이며 살아 있어서 일반 개념으로 묶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숙련된 장인이 재료를 다루며 느끼는 감각과 비슷합니다. 그 감각은 말로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실제 작업에서는 매우 정확하게 작동합니다. 흑백요리사 시즌2에서 종이 한 장 차이보다 더 미세한 차이로 생존과 탈락이 결정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승자 최강록이 재료마다 그릇을 달리하여 다르게 조림한 것을, 예를 들면, ‘중불로 적당하게’ 이런 식으로 획일화, 규칙화, 교리화를 하면, 이후 그 레시피를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했다고 해서 과연 그 맛이 재현될까요? 천국의 천사들이 바로 이런 퍼셉션으로 생활하며, 그래서 그들은 일상 대인관계나 지상의 누구를 도울 때 실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퍼셉션으로 섬기기 때문에 온전하며, 완전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동시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이러한 퍼셉션 능력은 장차 사라질 것이었고, 실제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후의 인류는 더 이상 내적인 빛으로 즉각 알지 못하고, 오직 잘 정돈된 교리를 통해 배우며 점진적으로 선과 진리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이 전환을 대비하여, 에녹이라는 교회에게 퍼셉션 내용을 교리로 정리하는 일이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퍼셉션 자체를 살아내는 교회가 아니라, 퍼셉션을 기억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맡은 교회였습니다. 그 교리는 퍼셉션 그 자체는 아니지만, 퍼셉션이 다시 회복될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표현은, 이 교리가 인간의 판단이나 역사적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 안전하게 보존되었음을 뜻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설명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현실을 깊이 비춥니다. 우리는 대부분 교리를 통해 신앙을 배웁니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라, 현재 인류의 상태에 맞는 방식입니다. 다만 교리가 곧 생명이라고 착각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교리는 빛을 가리키는 창이요, 담아두는 그릇이지, 빛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퍼셉션이 ‘미세하고 개별적’이라는 말은 선과 진리를 규칙이나 원칙이 아니라 각 상태와 순간 속에서 직접 분별하는 살아 있는 인식을 뜻합니다. 이 인식은 너무 살아 있어서 언어로 고정될 수 없고, 교리로 완전히 담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사라졌고, 대신 교리가 보존되었습니다. 이 흐름을 이해할 때, 에녹의 교회와 그 보존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

 

 

그러니까 첫 천적 인간이었던 ‘사람’, 곧 아담 교회 때는 이런 퍼셉션이 온전했던, 그래서 천국 천사들과 거의 차이가 없어 그 시절엔 천사들도 지상에 내려와 같이 대화도 하고 어울릴 수 있었지만, 차츰 외적 감각, 그러니까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및 촉각에 익숙해져 간 그 후손들, 곧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으로 내려오면서 점점 속 아닌 겉, 즉 내면보다 외면을 추구, 오직 내면으로만 들을 수 있는 퍼셉션이 잘 안 들리게 되었으며, 그 결과 삶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잘 모르게 되자 부득이하게 그 하나하나를 교리 형태로 정돈할 필요가 생겼고, 그래서 그때 이 일에 쓰임 받은 사람들, 곧 교회가 바로 에녹인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이 에녹이라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곧 그들의 퍼셉션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었는데 다음은 그 기록입니다.

 

‘에녹’(Enoch)이라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퍼셉션의 상태와 성격 또한 저는 알 수 있었는데요, 그것은 어떤 분명함도 없는, 다소 일반적이고 어두운 퍼셉션의 한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마음이 자기 안에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교리적인 것들 쪽으로 그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게 되는 그런 퍼셉션이었습니다. (AC.522)

 

즉 이미 그들 자신, 퍼셉션이 거의 정상 작동을 하지 않는, 그런 안타까운 상태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 그들은 여러 전해 내려오는 선과 진리들을 수집, 잘 정돈하여 나름 교리화, ‘퍼셉션이 사라진 이후를 대비한 형식화된 분별의 틀’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직접 알던 시대가 끝난 뒤에도’, 인간이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은 ‘교리적 토대’를 구축하는 일에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비록 영적 시력은 거의 잃어가고 있으나 힘을 다하여 수고, 후손들이 여전히 주님 안에서, 그러니까 주님의 선과 진리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게 하려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와 ‘여호와와 동행하다’는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의 교리에 따라 살고 가르치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사랑의 삶, 곧 쓰임새의 삶을 직접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 구분은 결코 사소하지가 않습니다. 이는 교회의 중심이 퍼셉션과 사랑의 삶에서 교리와 신앙의 삶으로 이동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표시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말은, 이 교리가 인간의 판단이나 역사적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 안에 보관되었다’는 뜻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더 이상 역사 속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그 교리는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안전하게 간직됩니다. 이는 교회의 생명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이어졌다는 의미입니다.

 

평소 우리가 알던 에녹 이야기와 오늘 설교는 아주 다릅니다. 보통은, 에녹이 얼마나 평생을 주님과 동행하였으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겠는가? 우리도 그런 에녹의 삶을 본받아야 하겠다는 식이지요. 이 역시 좋습니다. 겉뜻에 충실한 해석이지만, 그렇게 해서 정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실 수 있었다면 얼마나 할렐루야입니까? 우리는 절대 겉뜻으로 신앙 생활하시는 분들을 무조건 폄훼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너무 엉뚱하게 해석, 잘못된 길로만 빠지지 않으신다면 말입니다.

 

한 가지, 그렇다면 이 퍼셉션은 에녹 이후로, 태고교회 이후로 이제 완전히 인류한테서 떠난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창문, 곧 천국을 향해 열린 창문으로 들어옵니다. 그때 이후 인류가 이 퍼셉션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이 창문이 닫혀있기 때문인데, 그러나 지금도 이 창문을 여는 사람한테는 감사하게도, 그리고 놀랍게도 이 퍼셉션은 변함없이 작동한다고 합니다. 현 시대 가장 최근의 성자라 할 수 있는 정교회 뽀르피리우스를 비롯,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수많은 성인들, 그러니까 이현필, 이세종을 비롯, 분도 요셉 라브르, 성 프란체스코 등이 그렇습니다. 이분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이분들은 하늘을 향해 자기 내면의 창문을 여신 분들이지만 우리는 세상에 몰두하느라 창문을 열어도 세상 창문만 열고 산다는 점입니다. 우리 역시 이제라도 세상 창문은 닫고 천국 창문을 열면 이 퍼셉션은 다시 재개된다고 합니다.

 

다만 이 퍼셉션은 생명과도 같아 서서히 움직입니다. 즉 서서히 증가하고 서서히 사라지고 하는 것이죠. 퍼셉션을 다시 깨어나게 하고 싶으면 일상 매 순간 양심의 소리, 옳고 그름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때마다 하나씩 인내심을 가지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손해 볼 것 같아도 주님을 의지하고 황소 걸음처럼 뚜벅뚜벅 제 길을 걸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다 주께 하듯 하라신 말씀 기억하고, 사람 가려 가며, 환경 탓하는 대신 범사에 감사하며, 그저 매 순간 주님 앞에 제 할 도리만 다하면 됩니다. 그러면 서서히 이 퍼셉션 근육이 생기며, 기운이 돌아옵니다. 영혼의 근육이 생겨 기운을 차리게 되지요. 그러면서 점점 주님 음성이 들리며 영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어두운 시대에 이런 식으로 다시 천국을 향한 자신의 창문을 열어 미약하나마 퍼셉션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1-18(D1)

 

2634, 27. 창5.3, 2026-01-18(D1)-주일예배(창5,21-24, AC.516-522), ‘에녹, 퍼셉션을 교리로 보존한 사람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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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1/25, 창5:25-27), '퍼셉션 이야기 (심화)'

오늘은 창세기 5장 네 번째 시간, 25절로 27절이며, AC 글 번호로는 523번에서 525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5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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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1/11, 창5:4-20),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오늘은 창세기 5장 두 번째 시간, 4절로 20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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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2

 

‘에녹’(Enoch)이라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퍼셉션의 상태와 성격 또한 저는 알 수 있었는데요, 그것은 어떤 분명함도 없는, 다소 일반적이고 어두운 퍼셉션의 한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마음이 자기 안에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교리적인 것들 쪽으로 그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게 되는 그런 퍼셉션이었습니다. The state and quality of the perception with those who were called “Enoch” have also been made known to me. It was a kind of general obscure perception without any distinctness; for in such a case the mind determines its view outside of itself into the doctrinal things.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가 지녔던 퍼셉션의 ‘질감’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앞선 교회들에서 퍼셉션은 개별적이고 나름 분명했지만, 에녹의 교회에 이르면 그 퍼셉션은 더 이상 또렷한 분별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살아 있는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흐릿해져 전체적으로만 느껴지는 상태가 됩니다. 시력을 점점 잃어가다가 결국 사물이 그저 어렴풋이 보이는 지경까지 이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떤 분명함도 없는, 다소 일반적이고 어두운 퍼셉션의 한 형태’(a kind of general obscure perception without any distinctness)라고 표현한 것은, 선과 진리를 전혀 모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즉각적으로 분별해 내는 힘’이 약해졌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대강은 알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나타나는 중요한 변화가 바로 ‘시선의 이동’입니다. 마음이 자기 안에서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 그 판단의 근거를 ‘자기 밖’에서 찾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깥’이 바로 교리적인 것들입니다. 즉, 살아 있는 퍼셉션 대신, 이미 정리된 교리와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려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가끔 법관들이, 판사들이 일반인도 이해할 수 없는 엉뚱한 판정을 내리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기 안에 양심의 빛, 하늘의 빛이 없어 바깥, 곧 대세와 상황에서 답을 찾은 것이지요. 다만 에녹과 오늘날의 차이는 그래도 에녹이라는 사람들은 방향, 곧 하늘을 향한 방향이었지만,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선 AC.519–521의 흐름과 정확히 맞닿아 있어요. 에녹의 교회는 퍼셉션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교리가 필요해졌고, 그 교리는 이후 세대를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AC.522는 그 이유를 ‘인식의 실제 상태’ 차원에서 설명해 주는 글입니다. 퍼셉션이 분명하지 않으니, 마음은 자연스럽게 교리로 향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상태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것을 타락이나 실패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섭리 안에서 허락된 전환’입니다. 퍼셉션으로 살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교리라는 외적 기준이 주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설명은 오늘날 많은 신앙인의 상태를 정확히 짚어 줍니다. 우리는 종종 ‘마음으로는 알겠는데, 분명하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 구절, 교리 문장, 신앙의 원칙을 찾아 확인하려 합니다. 이것은 위선이 아니라, 퍼셉션이 일반화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다만 이 글은 동시에 하나의 경고도 담고 있어요. 마음의 판단이 완전히 바깥으로만 향하게 될 때, 신앙은 점점 ‘규범 중심’으로 굳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교리는 필요하지만, 교리만으로는 생명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교리를 만들어 보존했지만, 그 교리 자체가 퍼셉션의 생명을 회복시켜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AC.522는 에녹의 교회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퍼셉션은 남아 있으나 흐릿해졌고, 그 결과 마음은 자기 안의 빛보다 바깥의 교리를 더 의지하게 된 상태라고 말입니다. 이 상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직전의 중요한 징후이며, 교회가 더 이상 퍼셉션만으로 유지될 수 없게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결국 이 글은 교리의 필요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 줍니다. 교리는 퍼셉션이 약해진 시대에 꼭 필요한 기준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살아 있는 인식이 회복되어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로만 남아야 합니다. 에녹의 교회는 바로 그 전환의 자리에 서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AC.523, 창5: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AC.523-524)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And Methuselah lived a hundred eighty and seven years, and begat Lamech. (창5:25) AC.523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라멕’(Lamech)은 아홉 번째 교회를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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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1, 창5:23-24,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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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라는 말이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보존되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 관하여 말하자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에녹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에서 퍼셉션의 대상이었던 것들을 교리로 정리하였는데, 그 교회의 시대에는 그러한 일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퍼셉션으로 아는 것과 교리로 배우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퍼셉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식화된 교리로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규칙을 가지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그 규칙이 거의 예술 수준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굳이 그런 걸로 생각하는 법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되면 오히려 바르게 생각하는 능력이 손상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학문적 잔재에 매달리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경우와 같습니다. 퍼셉션으로 배우는 이들에게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내적인 길로 알게 하시지만, 교리로 배우는 이들에게는 외적인 길, 곧 육체적 감각의 길을 통해 지식이 주어집니다. 이 둘의 차이는 빛과 어둠의 차이와 같습니다. 또한 천적인 사람의 퍼셉션은 묘사 자체를 허용하지 않을 만큼 그러한데, 이는 상태와 상황에 따라 모든 미세하고 개별적인 것들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장차 사라질 것이고, 그 이후에는 인류가 선과 진리를 교리를 통해, 곧 어둠을 통해 빛으로 나아가며 배우게 될 것이 예견되었으므로, 여기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God took him)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보존되었음을 뜻합니다. As to the words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signifying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the case with Enoch, as already said, is that he reduced to doctrine what in the most ancient church had been a matter of perception, and which in the time of that church was not allowable; for to know by perception is a very different thing from learning by doctrine. They who are in perception have no need to learn by formulated doctrine that which they know already. For example: he who knows how to think well, has no occasion to be taught to think by any rules of art, for in this way his faculty of thinking well would be impaired, as is the case with those who stick fast in scholastic dust. To those who learn by perception, the Lord grants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by an inward way; but to those who learn from doctrine, knowledge is given by an external way, or that of the bodily senses; and the difference is like that between light and darkness. Consider also that the perceptions of the celestial man are such as to admit of no description, for they enter into the most minute and particular things, with all variety according to states and circumstances.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ould perish, and that afterwards mankind would learn by doctrines what is true and good, or by darkness would come to light, it is here said that “God took him,” that is, preserved the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를 가리켜 왜 ‘사라졌지만 보존되었다’고 말하는지를 가장 깊이 있게 설명해 줍니다. 핵심은 퍼셉션과 교리의 ‘질적 차이’에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초기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를 퍼셉션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교리로 정식화하는 일이 오히려 부적절했습니다. 이미 살아 있는 인식으로 알고 있는 것을 규칙과 문장으로 묶어 두는 것은, 생명을 틀에 가두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실제적인 예로 설명합니다.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규칙을 가지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그 규칙이 거의 예술 수준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굳이 그런 걸로 생각하는 법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는 비유가 그렇습니다. 이미 살아 있는 사고능력을 지닌 사람에게 규칙을 강요하면, 그 능력은 오히려 경직되고 약해집니다. 이는 퍼셉션의 영역에서 교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정확히 보여 주는 비유예요.

 

퍼셉션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앎은 ‘내적인 길’을 통해 옵니다. 주님께서 직접 선과 진리를 비추어 주시는 방식이지요. 반면 교리를 통해 배우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앎은 ‘외적인 길’, 곧 감각과 언어와 개념을 통해 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둘의 차이를 빛과 어둠의 차이에 비유합니다. 빛은 사물을 곧바로 보게 하지만, 어둠에서는 더듬어 가며 배워야 하기 때문이에요.

 

특히 주목할 점은, 천적인 사람의 퍼셉션에 대해 ‘묘사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의 시대에는 교리가 필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용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AC.521 해설 중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라는 게 무엇인지?

위 521 해설 중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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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글의 핵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미리 보셨다’고 말합니다. 퍼셉션의 능력이 장차 사라질 것이고, 그 이후의 인류는 더 이상 내적인 빛으로 즉각 알지 못하고, 교리를 통해 배우며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게 될 것을 예견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예견 때문에, 에녹의 교회에서 정리된 교리는 버려지지 않고 보존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말은, 이 교리가 인간의 판단이나 역사적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 안에 보관되었다’는 뜻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더 이상 역사 속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그 교리는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안전하게 간직됩니다. 이는 교회의 생명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이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오늘날 교회가 교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교리는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생명이 사라진 시대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이 약화된 시대일수록, 교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결국 AC.521은 에녹의 교회를 이렇게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던 시대에는 필요 없었지만, 퍼셉션이 사라질 시대를 대비해 주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교리의 그릇이라고 말입니다. 에녹은 사라졌으되, 그가 남긴 교리는 후대를 위해 살아남았습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말은, 상실의 언어가 아니라 ‘섭리와 준비의 언어’입니다.

 

 

 

AC.522, 창5:23-24, ‘에녹’(Enoch)이라는 사람들의 퍼셉션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2 ‘에녹’(Enoch)이라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퍼셉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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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0, 창5:23-24,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AC.520-522)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And Enoch walked with God,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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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창5:23, 24)

 

AC.520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라는 표현은 그 기간이 매우 짧았음(few)을 의미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walking with God)라는 표현은 앞에서와 같이 신앙에 관한 교리(doctrine concerning faith)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라는 표현은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하여 보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By “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is signified that they were few. By his “walking with God” is signified, as above, doctrine concerning faith. By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is signified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가 지닌 독특한 성격을 아주 압축적으로 정리해 줍니다. 먼저 ‘삼백육십오’(365)라는 숫자는 장수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에녹의 교회가 차지한 ‘기간과 영향력이 길지 않았음’을 가리킵니다. 즉, 에녹의 교회는 태고교회의 긴 흐름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 창세기 1, 2, 3장을 비롯, 노아 이전까지 나오는 태고교회는 지질학적 지구 나이인 45, 6억 년 관점에서 보면, 아주아주 장구한 세월을 거쳐 나타났다가 역시 매우 오랜 세월을 거쳐 사라진 교회로 짐작되며, 이 점을 감안하면서 에녹의 기간을 생각하면 더욱 선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짧았다고 해서 의미마저 작았던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양이 아니라 ‘기능’에 주목합니다. 에녹의 교회는 오래 지속되기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내용을 ‘교리의 형태로 보존하기 위해 잠시 존재’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기간이 짧았다’는 말은 실패나 미완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목적에 정확히 맞는 짧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시 한번 강조되듯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은 신앙에 관한 교리를 뜻합니다. 에녹의 교회는 사랑의 삶을 직접 사는 교회라기보다, 그 사랑과 퍼셉션에서 나왔던 진리들을 ‘정리하고 가르치는 교회’였습니다. 이 교리는 이후의 교회들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분별하는 기준으로 쓰이게 됩니다.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사라짐처럼 들리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소멸이 아니라 ‘전환’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더 이상 역사 속에서 독립된 교회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 교리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것을 ‘데려가셨다’는 말로 표현되듯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안전하게 보존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인간의 선택이나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의도적인 보존’을 뜻합니다. 퍼셉션이 점점 약화되고, 교회가 외적인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서, 주님께서는 장차 올 교회들을 위해 필요한 교리를 따로 떼어 보관하신 것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교회의 역할이 항상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어떤 교회는 오래 지속되며 많은 열매를 맺는 역할을 맡고, 어떤 교회는 짧게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다음 시대를 위한 ‘결정적인 씨앗’을 남기는 역할을 맡습니다. 에녹의 교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될 수 있어요. 어떤 시기에 우리는 많은 활동과 성취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진리와 신앙의 핵심을 정리하고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라면, 혹시 그 시간이 짧았어도 그 짧음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데 꼭 필요한 시간이 됩니다.

 

결국 AC.520은 에녹의 교회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짧게 존재했지만, 신앙의 교리를 보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교회. 역사 속에서는 사라졌지만,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주님께서 직접 간직하신 교회. 이 점을 붙들 때,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는 이 말은 상실의 언어가 아니라, ‘보존과 은혜의 언어’로 들리게 됩니다.

 

 

 

AC.521, 창5:23-24,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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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9, 창5:22,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의 속뜻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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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러한 교리가 규범, 곧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기 위한 규범으로 쓰이게 하려고 그런 건데, 이 일을 한 사람들을 가리켜 ‘에녹’(Enoch)이라 하며, 이것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and Enoch walked with God)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성한 교리를 또한 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이는 ‘에녹’이라는 이름의 뜻이 ‘가르치다’(instruct)라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또한 이는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의 의미와, 그가 ‘여호와가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였다’(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라고 하는 사실에서도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walk with God)은 신앙의 교리에 따라 가르치고, 또 살아가는 것을 뜻하지만,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walk with Jehovah)은 사랑의 삶(life)을 사는 것, 곧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무엇을 하든 그 동기가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것이지요. ‘동행하다’(walk)라는 말은 살아가는 걸 의미하는 상용 표현으로, ‘율법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law), ‘규례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statutes), ‘진리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truth)와 같은 표현이 그러합니다.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은 본래 길과 관련된 말로서, 진리와 관련되며, 따라서 신앙이나 신앙의 교리와 관련됩니다. 성경에서 ‘동행하다’(walking)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음의 말씀들에서 어느 정도 분명해집니다. There were some at that time who framed doctrines from the things that had been matters of perception in the most ancient and succeeding churches, in order that such doctrine might serve as a rule whereby to know what was good and true: such persons were called “Enoch.”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so did they call that doctrine; which is likewise signified by the name “Enoch,” which means to “instruct.”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expression to “walk,” and from the fact that he is said to have “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 to “walk with God” is to teach an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faith, but to “walk with Jehovah” is to live the life of love. To “walk” is a customary form of speaking that signifies to live, as to “walk in the law,” to “walk in the statutes,” to “walk in the truth.” To “walk” has reference properly to a way, which has relation to truth, consequently to faith, or the doctrine of faith. What is signified in the Word by “walking,” may in some measure app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2] 미가에서는 In Micah: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He hath showed thee,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th Jehovah require of thee, but to do judgment and the love of mercy, and to humble thyself by walking with thy God? (Micah 6:8)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walk with God)은 여기서 말씀하신 것들을 따라 사는 걸 뜻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하나님과’(with God)라고 되어 있고, 에녹에 대해서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from with God)라는 의미를 지닌 다른 말이 쓰여, 그 표현이 다소 중의적으로 사용됩니다. 시편에서는 where to “walk with God” signifies to live according to the things here indicated; here, however, it is said “with God,” while of Enoch another word is used which signifies also “from with God,” so that the expression is ambiguous. In David: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시56:13) Thou hast delivered my feet from impulsion, that I may walk before God in the light of the living, (Ps. 56:13)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하나님 앞에 다니는 것’(walk before God)은 신앙의 진리 안에서 동행하는 것을 뜻하며, 이것이 곧 ‘생명의 빛’(light of the living)입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에서는 where to “walk before God” is to walk in the truth of faith, which is the “light of the living.” In like manner in Isaiah: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9:2) The people that walk in darkness see a great light. (Isa. 9:1)

 

라고 말합니다. 또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So the Lord says by Moses: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레26:12) I will walk in the midst, and will be your God, and ye shall be my people, (Lev. 26:12)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율법의 교리에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signifying that they shoul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the law.

 

[3]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렘8:2) They shall spread them before the sun, and the moon, and to the armies of the heavens, whom they have loved, and whom they have served, and after whom they have walked, and whom they have sought, (Jer. 8:2)

 

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는 사랑의 것들과 신앙의 것들이 분명히 구별됩니다. 사랑의 것들은 ‘사랑하며’(loving)와 ‘섬기며’(serving)로 표현되고, 신앙의 것들은 ‘뒤따르며’(walking)와 ‘구하며’(seeking)로 표현됩니다. 모든 예언서에서는 모든 표현이 정확하게 사용되며, 어느 한 용어도 다른 용어를 대신하여 쓰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여호와와 동행하다’(walk with Jehovah) 또는 ‘여호와 앞에서 행하다’(before Jehovah)라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 manifest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e things of love, and those of faith; the things of love being expressed by “loving” and “serving”; and those of faith by “walking” and “seeking.” In all the prophetical writings every expression is used with accuracy, nor is one term ever used in the place of another. But to “walk with Jehovah,” or “before Jehovah,” signifies, in the Word, to live the life of love.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가 왜 태고교회 흐름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에녹의 교회는 퍼셉션 그 자체로 살아가던 교회가 아니라, ‘퍼셉션의 내용으로부터 교리를 구성하여 보존하려 했던 교회’였습니다. 퍼셉션이 점차 약화되면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즉각적으로 알 수 없게 되자, 그것을 대신할 규범이 필요해졌고, 그 결과 교리가 형성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리를 단순한 인간적 산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된 보존의 방식이었습니다. 에녹이라 불린 사람들은, 이전 교회들에서 살아 있던 퍼셉션의 내용을 붙잡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녹’(Enoch)이라는 이름 자체가 ‘가르치다’(instruct)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와 ‘여호와와 동행하다’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의 교리에 따라 살고 가르치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사랑의 삶, 곧 쓰임새의 삶을 직접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 구분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이는 교회의 중심이 퍼셉션과 사랑의 삶에서 교리와 신앙의 삶으로 이동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표시입니다.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 자체도 이 변화를 잘 드러냅니다. 동행은 길과 관련된 말이며, 길은 진리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동행하다’는 주로 신앙과 교리, 진리의 길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예언서의 구절들을 통해, 이 표현이 얼마나 일관되고 정확하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랑과 관련된 표현과, 신앙과 관련된 표현이 결코 뒤섞여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강조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깊이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감정적 친밀감이나 개인적 체험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에녹의 교회가 보여 주는 동행은, ‘교리를 통해 신앙의 방향을 유지하는 삶’입니다. 이는 살아 있는 퍼셉션이 약해진 시대에, 신앙을 지키는 매우 현실적인 방식입니다.

 

동시에 이 글은 교리의 한계도 암시합니다. 교리는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막는 그릇이 될 수는 있습니다. 에녹의 교회는 바로 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퍼셉션이 직접 작동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 진리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교리라는 형태로 다음 시대에 전해지도록 준비한 것입니다.

 

결국 AC.519는 에녹의 교회를 ‘보존의 교회’, ‘가르침의 교회’로 규정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신앙의 교리를 따라 살고 그것을 가르친다는 뜻이며, 이는 퍼셉션이 약화된 시대 속에서도 주님께서 교회의 생명을 이어 가시는 섭리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이 글은 교회 역사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성찰하게 만드는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AC.518, 창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C.518-519)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22) AC.518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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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22)

 

AC.518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는 신앙에 관한 교리를, ‘자녀들을 낳았으며’(begat sons and daughters)는 진리와 선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To “walk with God” signifies doctrine concerning faith. That he “begat sons and daughters” signifies doctrinal matters concerning truths and goods.

 

 

해설

 

이 글은 ‘에녹’(Enoch)이라는 교회가 지닌 성격을 아주 분명한 방향으로 규정해 줍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전 교회들처럼 퍼셉션 그 자체가 중심이 아니라, ‘교리’(doctrine)가 중심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표현을 흔히 삶의 친밀함이나 경건의 정서로 읽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신앙에 관한 교리로 해석합니다. 이는 에녹의 교회가 신앙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전수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뜻합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던 초기 태고교회에서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굳이 교리로 정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퍼셉션, 곧 선과 진리에 관한 인식이 매 순간 직접적이었기 때문이었고, 그냥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서 말입니다. 그러나 퍼셉션이 점차 약화되면서 선과 진리에 관한 순간순간, 혹은 특정 상황에 대한 주님의 뜻을 알기가 어렵게 되었고, 이걸 그대로 두었다가는 교회의 생명이 사라질 위험이 커졌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리가 필요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이 교리를 뜻한다는 것은, 신앙이 더 이상 즉각적인 인식, 곧 퍼셉션이 아니라 ‘배워야 하고 지켜야 할 내용’으로 정리되기 시작했음을 보여 줍니다.

 

자녀들을 낳았다는 표현 역시 같은 흐름 안에 놓여 있습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자녀들이 퍼셉션된 진리와 선 자체를 가리켰다면, 여기서는 그것들이 ‘교리적 형태’로 나타납니다. 즉, 퍼셉션으로 그때그때 직접 인식하는 진리와 선이 아니라, 가르칠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는 교리로서의 진리와 선으로 말입니다.

 

이 점에서 에녹의 교회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에 있습니다. 퍼셉션의 생명은 약해졌지만, 그 대신 교리를 통해 신앙의 핵심을 보존하려는 시도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쇠퇴의 증거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방편입니다. 생명이 사라져 가는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교리를 통해 다음 시대를 위한 씨앗을 남기신 것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신앙의 두 가지 양식을 분명히 구분해 줍니다. 하나는 살아 있는 퍼셉션에 의해 이끌리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교리를 통해 길을 찾는 신앙입니다. 천사들처럼 퍼셉션으로 하는 신앙생활이 계속 가능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전자가 사라졌다고 해서 후자가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점점 어두워져 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는 에녹의 교회처럼, 교리는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유일한 ‘보존의 그릇’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도 이와 닮아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할 때, 마음의 느낌이나 개인적 체험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동행을 교리로 설명합니다. 이는 신앙이 감정이나 분위기에 머무르지 않고, 분명한 내용과 구조를 가져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AC.518은 에녹의 교회를 ‘교리의 교회’로 또렷하게 규정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교리 속에서 유지되고, 자녀들은 그 교리가 담고 있는 진리와 선입니다. 이 글은 퍼셉션이 약화된 시대에도, 주님께서 교리를 통해 신앙의 생명을 이어 가신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AC.519, 창5:22,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의 속뜻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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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7, 창5:21, ‘에녹’(Enoch) 이야기를 시작하며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창5:21) AC.517 ‘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의 퀄러티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The quality of the church “Enoch”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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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창5:21)

 

AC.517

 

‘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의 퀄리티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The quality of the church “Enoch”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s.

 

 

해설

 

이 문장은 새로운 내용을 제시하기보다, ‘독자의 시선을 앞으로 이끄는 표지판’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는 이름들을 통해 교회의 연속과 단계만을 간략히 언급해 왔다면, 여기서부터는 ‘에녹’의 교회가 지닌 고유한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즉, 단순한 나열에서 벗어나 ‘질적 설명’으로 전환된다는 신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굳이 이 문장을 따로 적어 둔 것은, ‘에녹’이 태고교회의 흐름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앞선 교회들은 비교적 자연스러운 쇠퇴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었지만, 에녹의 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어떤 것을 ‘보존하시는 섭리’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는 성급히 설명하지 않고, 다음 절들에서 차분히 그 성격을 풀어 갈 준비를 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문장은 말씀을 읽는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어떤 대목에서는 서둘러 결론을 내리기보다, 이어질 설명을 기다리며 흐름을 따라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에녹의 교회는 그렇게 ‘기다리며 읽어야 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517은 태고교회의 이야기 속에서 ‘에녹이라는 전환점이 시작됨을 알리는 예고’입니다. 다음 절들에서 퍼셉션이 어떻게 보존되고, 교회의 생명이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게 되는지가 본격적으로 밝혀질 것을 준비시키는 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516, 창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C.516-517)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창5:21) AC.516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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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창5:21)

 

AC.516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Enoc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seventh church; and by “Methuselah” an eighth.

 

 

해설

 

이 글은 짧지만, 창세기 5장 전체를 꿰는 매우 중요한 분기점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에녹’과 ‘므두셀라’를 단순히 앞선 이름들과 같은 선상에 두지 않고, 명확하게 ‘교회의 단계’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에녹을 ‘일곱 번째 교회’로 지칭하는 것은, 그가 이전의 흐름과 질적으로 다른 상태임을 분명히 하는 선언입니다.

 

앞선 여섯 단계, 즉 아담에서 야렛까지의 흐름은 하나의 큰 방향성을 공유합니다. 그것은 ‘퍼셉션이 점점 외적이 되어 가는, 그러니까 흐릿해져 가는 과정’입니다. 주님과 직접 연결된 내적 인식에서 출발하여, 점차 인간의 자의식, 외적 지식, 형식적 경건, 외적 생활 중심의 신앙으로 이동해 가는 과정이지요. 이 흐름은 쇠퇴이지만, 동시에 섭리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쇠퇴 자체를 막으시기보다,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보존하십니다.

 

그 보존의 결정적 형태가 바로 ‘에녹’입니다. 그래서 에녹은 단순히 ‘야렛 다음에 나온 또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앞선 여섯 단계 전체를 수렴하고 정리하는 ‘별도의 교회’로 불립니다. 에녹은 ‘퍼셉션의 상태’라기보다, ‘퍼셉션이 사라진 시대 속에서 진리가 의식적으로 보존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사람들 전체가 직관적으로 주님을 아는 시대는 아니지만, 그 대신 진리가 정리되고, 저장되고, 훗날을 위해 보관되는 단계입니다.

 

이 점에서 에녹은 이전 교회들과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앞선 단계들은 모두 ‘살았고 죽었더라’로 끝납니다. 이는 그 상태들이 더 이상 살아 있는 교회로 지속되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에녹은 이후 본문에서 ‘죽었더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에녹이 ‘종결된 교회’가 아니라, ‘보존된 교회’임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것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므두셀라’를 여덟 번째 교회로 연결합니다. 이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에녹을 특별한 예외처럼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에녹에서 끝내지 않습니다. 에녹은 목적지가 아니라, 연결 고리입니다. 에녹이 진리를 ‘보존하는 교회’라면, 므두셀라는 그 보존된 진리가 실제 역사 속에서 ‘연장되고 지속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므두셀라가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인물로 기록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물학적 장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된 진리가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었다’는 상응 표현입니다. 즉, 에녹을 통해 저장된 진리의 ‘씨앗’이, 므두셀라라는 단계에서 장기간 인류 안에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진리의 연장은 결국 노아의 교회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AC.516은 단순한 주석 문장이 아닙니다. 이 문장은 창세기 5장이 ‘쇠퇴의 기록’이 아니라, ‘보존의 역사’임을 선언하는 열쇠 문장입니다. 인간의 퍼셉션은 사라질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직접 아는 교회가 끝날 때, 기억하는 교회를 일으키시고, 기억하는 교회가 위태로워질 때, 기록되고 보존되는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말하면, 에녹과 므두셀라는 오늘 우리에게 매우 현실적인 위로를 줍니다. 우리가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주님을 ‘자연스럽게’ 느끼지 못해도, 우리의 신앙이 형식적이고 외적으로 느껴져도, 주님께서는 그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진리를 보존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에녹의 상태라면, 우리는 ‘느끼지는 못해도 지키기는 하는 신앙’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고, 므두셀라의 상태라면 ‘그 진리를 오래 견디며 다음 시대까지 넘겨주는 신앙’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AC.515, 창5:19-20,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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