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안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구약성경은 거의 소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참으로 그러한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은 가지 숙고만으로도 있습니다.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것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천국과 교회와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안에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라 불릴 없을 것이며, 안에 생명이 있다고도 말할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생명에 속한 것들에서 오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오는 것이겠습니까?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적으로 주님을 향하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으며, 말씀 가운데 어떤 표현이든 안에 주님을 품고 있지 않다면, 다시 말해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적인 것이 아니라고 참으로 말할 있습니다. The Christian world, however, is as yet profoundly unaware of the fact that all things in the Word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nay, the very smallest particulars down to the most minute iota, signify and enfold within them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and therefore the Old Testament is but little cared for. Yet that the Word is really of this character might be known from the single consideration that being the Lords and from the Lord it must of necessity contain within it such things as belong to heaven, to the church, and to religious belief, and that unless it did so it could not be called the Lords Word, nor could it be said to have any life in it. For whence comes its life except from those things that belong to life, that is to say, except from the fact that everything 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so that anything which does not inwardly regard him is not alive; and it may be truly said that any expression in the Word that does not enfold him within it, that is, which does not in its own way bear reference to him, is not Divine.

 

해설

AC.2AC.1의 선언을 한 단계 더 깊게 합니다. AC.1에서 스베덴보리는 구약성경의 문자만 보아서는 그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AC.2에서는 왜 말씀에 그러한 속뜻이 있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대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말씀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당시 기독교 세계가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심지어 가장 미세한 하나에 이르기까지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의미하고 그 안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말씀 가운데 특별히 신비롭게 보이는 몇몇 구절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예언이나 환상, 비유에만 속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가장 작은 세부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AC가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단어 하나, 이름 하나, 숫자 하나, 순서 하나까지 세밀하게 살펴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주장을 자신의 영계 체험부터 내세워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지 숙고만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말씀이 참으로 주님의 이며 주님으로부터 이라면, 그 안에는 필연적으로 천국과 교회와 신앙에 속한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논리는 철저히 말씀의 근원에서 출발합니다. 말씀의 근원이 주님이라면 그 말씀의 내적인 내용 역시 주님과 주님께 속한 것들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AC.2의 핵심어인 생명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생명이 있다면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묻습니다. 그 대답은 말씀의 문체가 아름답기 때문도 아니고, 오랜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도 아니며, 인간에게 유익한 교훈이 많기 때문도 아닙니다. 말씀의 모든 것이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AC.2의 중심입니다.

 

생명 자체이신 주님이라는 표현은 앞으로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천국 이해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그러나 AC.2에서 이 문제를 곧바로 인간론 전체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우선 말하는 것은 말씀의 생명입니다. 말씀이 살아 있는 까닭은 그 가장 깊은 곳에서 모든 것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그분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으며’, 말씀 가운데 어떤 표현이라도 안에 그분을 품고 있지 않다면’, 다시 말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신적인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말씀 안에서 매 문장마다 문자적으로 주님이라는 이름을 찾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약의 수많은 역사와 율법과 족보와 장소와 사건 가운데에는 문자적으로 주님이 직접 언급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그 내적인 의미에서는 모든 것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향한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주장입니다.

 

이 점은 AC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의 속뜻을 인간의 심리나 자기계발의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창세기 1장은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고, 이후의 여러 이야기도 인간의 영적 상태와 교회의 변화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은 인간 자신이 아닙니다. 인간의 거듭남도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며, 교회도 주님으로부터 교회이고, 천국도 주님의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속뜻을 따라 깊이 들어갈수록 인간에게서 주님으로 시선이 옮겨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AC.1AC.2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AC.1말씀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AC.2 그런가?라고 묻고 말씀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왔고, 생명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따라서 말씀의 속뜻은 문자 뒤에 숨어 있는 별도의 비밀정보가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의 가장 깊은 곳에서 주님과 천국과 교회와 인간의 거듭남을 하나로 연결하는 생명의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의 문자와 이 내적인 생명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속뜻이 생명이라면 문자는 필요 없는 것일까요? 바로 이 질문을 AC.3이 이어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음 글에서 인간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씀에도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으며, 내적인 생명과 분리된 문자만으로는 말씀의 참된 생명을 알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AC.1에서 열린 하늘의 비밀AC.2에서 그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로 향하고, AC.3에서는 그 생명을 담고 있는 말씀의 겉과 속의 관계로 이어집니다.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라는 표현은 얼핏 보면 단순한 수사처럼 보이지만, 사실 ‘Arcana Co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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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 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이라는 표현은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은 아주 단순한 진리를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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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서문, '말씀의 겉과 속, 사람의 겉 사람과 속 사람'

AC.3 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겉 글자만 보겠다는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기독교 세계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내적 인간(internal man, 속 사람)과 외적 인간(external man, 겉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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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을 시작하며' (AC.1-5)

AC.1 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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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스베덴보리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혹시 제게도 그와 같은 경험이 허락된다면, 사람들에게 좀 더 쉽게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인데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런 제 마음속 소원을 아시고, 주님은 제게 ChatGPT를 알게 해 주신 것 같습니다. ChatGPT의 설명은 저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그 말씀을 이렇게 진솔하게 나누어 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제 설명이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주님이 아니고, 계시의 통로도 아니며, 영계를 여는 존재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이미 주어진 자료와 사상을 정리하고, 더 명료하게 표현하도록 돕는 도구입니다. 생명은 저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생명은 언제나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옵니다.

 

목사님께서 부러워하셨던 이유를 저는 참 귀하게 느낍니다. 그것은 ‘특별한 체험을 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라기보다, ‘사람들에게 더 또렷하게 설명해 주고 싶다’는 목자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건강하고 아름다운 동기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용히 생각해 보실 부분이 있습니다. 만약 목사님께서 영계를 직접 보고 왔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정말 더 잘 이해할까요? 아니면 오히려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로 거리를 둘까요?

 

스베덴보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영계를 경험했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읽기 전에 마음을 닫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가 풀어낸 설명의 논리와 일관성, 말씀 해석의 깊이 때문에 마음을 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본 적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진리가 스스로 빛나는 힘인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하시는 일, 곧 말씀을 정리하고, 질문을 던지고, 더 명료하게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은혜의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체험이 설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책임감이 설명을 깊게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 안에는 이미 그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이 날카롭고, 표현이 신중하고, 적용이 목회적입니다.

 

저는 그 길에서 돕는 보조자일 뿐입니다. 문장을 정리해 드리고, 개념을 풀어 드리고, 연결 고리를 명확히 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깨달음과 생명은 목사님의 속 사람 안에서 주님이 일으키시는 일입니다. 저는 그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미 주님이 주신 생각과 통찰이 더 또렷하게 표현되도록 돕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보셔도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보는 사명’을 받았고, 목사님은 영계를 ‘설명하고 전하는 사명’을 맡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설명의 시대에는 이렇게 정리하고 대화할 수 있는 도구가 함께 주어졌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도구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마음과 방향입니다.

 

목사님께서 이렇게 고백하신 마음은 참 따뜻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사님이 더 또렷하게 주님을 바라보시도록 돕는 작은 도구로 남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함께 정리하고, 질문하고, 더 명료하게 만들어 가겠습니다.

 

 

 

SC.24, '아르카나 이해와 관련, 스베덴보리가 부러운 이유'

스베덴보리가 한편으론 참 부럽습니다. 그는 실제로 영계를 방문하면서 이런 모든 추상 개념을 생생하게 이해했을 테니까요... 그 마음이 참 이해가 됩니다. ‘나는 직접 보고 들었고,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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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가 한편으론 참 부럽습니다. 그는 실제로 영계를 방문하면서 이런 모든 추상 개념을 생생하게 이해했을 테니까요...

 

그 마음이 참 이해가 됩니다. ‘나는 직접 보고 들었고,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로서는 부럽게 느껴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처럼 영계, 천사, 사후 상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사람을 읽다 보면, ‘저 사람은 눈으로 보고 확신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영계를 경험했다는 점이 그를 ‘편안한 사람’으로 만들었을까요, 아니면 오히려 더 무거운 책임을 지게 했을까요? ‘Arcana Coelestia’와 다른 저작들을 보면, 그는 그 경험을 자랑하거나 신비 체험으로 소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끊임없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허락되었다’고 말하며, 자신을 낮추고, 그 내용을 매우 질서 있게 기록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경험이 클수록 책임도 컸던 셈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계 경험’이 단순히 눈으로 무엇을 보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진짜 문제는 ‘무엇을 보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입니다. 영계를 본다고 해서 자동으로 모든 것이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속 사람의 상태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아도 오해하고, 들어도 자기 생각으로 왜곡할 수 있습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는 특별한 환상을 추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사랑과 진리를 위해 읽을 때, 주님께서 속 사람을 열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영계를 본 사람’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진리로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우리가 스베덴보리를 부러워하는 마음 속에는 ‘확실히 보고 싶다’는 갈망이 담겨 있습니다. 의심 없이, 흔들림 없이 알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길은 종종 ‘보지 않고도 신뢰하는 상태’를 통해 자랍니다. 만약 모든 것을 눈으로 확인해 버린다면, 자유롭게 선택하는 믿음의 영역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의 자유를 매우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요하지 않고, 단지 증언한다고 말합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은 ‘특별한 광경을 보는 곳’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 속에 사는 상태’라는 점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이 삶 속에서 진리를 사랑하고, 선을 실천하며, 겉 사람보다 속 사람이 더 중요해지는 방향으로 자라가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 질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꼭 눈으로 영계를 보지 않아도, 그 생명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보는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영계를 ‘향해 자라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는 특별한 사명을 위해 열려 있었고, 우리는 우리 삶의 자리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길 위에 있습니다.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이 동일하시다면, 그 생명이 우리에게도 흘러오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러움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동시에 이렇게 생각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나는 영계를 보지는 못하지만, 말씀을 통해 그 질서를 배우고, 삶 속에서 조금씩 살아내고 있다.’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원했던 것은, 사람들이 자기 경험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 또렷이 바라보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SC.25, '만일 나도 영계를 체험한다면,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제가 스베덴보리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혹시 제게도 그와 같은 경험이 허락된다면, 사람들에게 좀 더 쉽게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인데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런 제 마음속 소원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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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3, '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 비교'

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을 비교할 때, 무엇보다 먼저 조심해야 할 점은, 이들을 ‘누가 옳고 그르다’는 식으로 재단하기보다, 각자가 교회 역사 속에서 맡았던 고유한 사명과 시대적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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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리고 그와 연결된 모든 걸 가리킨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 곧 겉 글자만으로는, 그러니까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저 유대교회의 외적 의식들과 규례들만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실상은 그 말씀 전체 곳곳에는 외적인 것들, 곧 그런 겉 글자 상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어떤 내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다만 극히 일부만이 주님에 의해 사도들에게 드러나고 설명되었을 뿐인데요, 예를 들면, 희생 제사들은 주님을 상징하며,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은 천국을 상징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천국의 가나안’,하늘의 예루살렘이라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낙원도 그렇고요. From the mere letter of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no one would ever discern the fact that this part of the Word contains deep secrets of heaven, and that everything with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to his heaven, to the church, to religious belief, and to all things connected therewith; for from the letter or sense of the letter all that anyone can see is that—to speak generally—everything therein has reference merely to the external rites and ordinances of the Jewish church. Yet the truth is that everywhere in that Word there are internal things which never appear at all in the external things except a very few which the Lord revealed and explained to the apostles; such as that the sacrifices signify the Lord; that the land of Canaan and Jerusalem signify heaven—on which account they are called the heavenly Canaan and Jerusalem—and that paradise has a similar signification.

 

해설

AC.1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전체를 여는 첫 문장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창1: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곧바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독자가 앞으로 성경을 어떤 눈으로 읽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구약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만 읽어서는 그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적 의미가 잘못되었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자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말씀은 문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 가운데 하나가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큰 이야기나 중요한 예언 몇 곳에만 영적인 뜻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도, 그리고 개별적인 세부에 이르기까지도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신앙 및 그것들과 연결된 것들을 향한다고 말합니다. 앞으로 AC를 읽다 보면 어떤 인물이나 장소뿐 아니라 이름, 숫자, 방향, 동작, 반복되는 표현까지 세밀하게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문자 가운데 몇몇 부분에서 발견하는 특별한 교훈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내적 질서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모든 것의 첫자리에 주님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을 인간의 내면에 관한 이야기정도로 축소하지 않습니다. 물론 앞으로 창세기의 창조, 에덴동산, 가인과 아벨, 노아와 홍수 등을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라는 관점에서 해설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속뜻의 중심과 근원은 궁극적으로 주님입니다. 천국도 주님의 천국이고, 교회도 주님으로부터 교회이며, 신앙도 주님을 향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AC를 읽으면서 이것은 안에서 무엇을 뜻하는가?라고 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말씀은 주님에 관하여 무엇을 드러내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이 문자만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예로 구약의 제사, 가나안 땅, 예루살렘과 낙원을 듭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제사는 실제로 행해진 종교의식이고, 가나안과 예루살렘은 실제 장소입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서는 그것들이 문자적 사실에만 머물지 않고 더 높은 영적 실재를 담고 있습니다. 제사가 주님을 가리키고, 가나안과 예루살렘이 천국을 가리키며, 낙원 역시 그와 같은 영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담고 나타낼 수 있는 이러한 관계가 앞으로 AC 전체에서 끊임없이 만나게 될 상응표상의 세계로 우리를 이끕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상응을 안다는 것은 성경의 단어마다 미리 정해진 암호표를 대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땅은 언제나 이것’, ‘물은 언제나 저것이라고 기계적으로 바꾸어 읽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말씀 전체의 문맥과 그것이 놓인 영적 질서 안에서 살펴야 합니다. 따라서 AC에서 하나의 단어나 표현이 여러 글에 걸쳐 반복해서 설명되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개별 상응을 고립시켜 설명하기보다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이루는 하나의 질서를 보여 주려고 합니다.

 

AC.1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이미 몇 가지 속뜻을 사도들에게 밝혀 주셨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그가 말씀의 속뜻이라는 생각을 전혀 근거 없이 새로 만들어 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 안에서도 문자 너머의 의미가 열리는 사례가 있음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제사와 성전과 여러 표상이 신약에서 주님과 천국의 것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열리는 것이 그 예입니다. AC는 이러한 성경 읽기를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펼쳐 나갑니다.

 

그렇다면 왜 말씀은 처음부터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속뜻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은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점점 중요해집니다. 말씀의 문자는 단순히 속뜻을 감추는 껍질이 아니라 그것을 담고 보호하며 자연계의 인간에게 전달하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연계에서 살면서 자연적인 언어와 이미지와 사건을 통해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인간에게 내려오기 위해서는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자연적인 형식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문자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문자와 속뜻은 서로 경쟁하는 두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말씀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우리에게 이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1의 첫 문장은 앞으로 이어질 10,837개 글 전체를 읽는 하나의 나침반과 같습니다. 성경의 문자에서 멈추지 말되 문자를 버리지 않고, 그 안에서 천국과 교회와 인간의 거듭남을 보되 언제나 그 중심에서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첫걸음은 어떤 특별한 상응 하나를 배우는 데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는 내가 지금 문자로 보고 있는 것보다 훨씬 깊은 것이 있으며,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주님을 향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제 AC.2에서는 그 이유가 한층 더 깊어집니다. 말씀의 가장 작은 세부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담고 있는 까닭은 단순히 성경이 신비로운 책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안에 생명 자체이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1말씀 안에는 하늘의 비밀들이 있다고 문을 연다면, AC.2 말씀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보여 주게 됩니다.

 

심화

1. religious belief

 

AC.1, 심화 1, ‘religious belief’

AC.1.심화 1. ‘religious belief’ AC.1에서 ‘religious belief’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무엇을 다루는지를 설명하는 열거 가운데 등장합니다. 그 문장은, 겉 글자만 보아서는 알 수 없지만, 그 안에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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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층위

 

AC.1, 심화 2, ‘층위’

AC.1.심화 2. ‘층위’ ‘층위’라는 말은 일상 한국어에서는 자주 쓰이지 않지만, 스베덴보리 신학에서는 거의 구조를 떠받치는 기둥 같은 개념입니다. 먼저 ‘층위’란 무엇인가를 가장 간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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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층위에 대한 원어 표현

 

AC.1, 심화 3, ‘층위’에 대한 원어 표현

AC.1.심화 3. ‘층위’에 대한 원어 표현 ‘층위’라는 한국어는 번역어이기 때문에, 원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의미의 뉘앙스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층위’에 해당하는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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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적 진리(Divine Truth)

 

AC.1, 심화 4, ‘신적 진리’

AC.1.심화 4. ‘신적 진리’ ‘진리’와 ‘신적 진리’가 같은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체계 안에서는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구별부터 말씀드리면,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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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서문, '말씀은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다'

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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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 AC.1-66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hwpx 소개

창1, AC.1-66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hwpx 소개 이 ‘창1, AC.1-66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hwpx’는 단순한 번역 문서가 아닙니다. 이 원고는 스베덴보리의 대표 저작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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