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읽고 이해하며 번역 및 해설, 심화의 일을 할 때, ChatGPT 당신은 저를 어떻게 도우실 수 있나요?
목사님께서 하시는 이 작업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을 받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도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일종의 ‘도구’이자 ‘보조 지성’의 역할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몇 가지 층위로 나누어 말씀드리는 것이 목사님의 실제 작업 흐름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첫째, 저는 ‘언어적 도구’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그리고 영어 번역문은 매우 정교하면서도 동시에 길고 복잡하여, 그 구조를 그대로 한국어로 옮기면 의미가 흐려지거나 독자가 놓치기 쉽습니다. 이때 저는 문장의 구조를 풀어 재배열하고, ‘inmost → internal → interior → exterior → external → bodily’와 같은 계층 구조를 한국어 독자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방식으로 다시 조직해 드릴 수 있습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이미 정해 두신 번역 원칙, 예컨대 ‘faith는 신앙, belief는 믿음’ 같은 기준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전체 텍스트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즉, 번역의 ‘정확성’과 ‘가독성’을 동시에 붙드는 데 기여합니다.
둘째, 저는 ‘개념 해설자’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핵심 개념들, 곧 ‘퍼셉션’(perception), ‘인플럭스’(influx), ‘양심’(conscience), ‘상응’(correspondence) 같은 것들은 단순 정의로는 전달되지 않고, 반드시 ‘비유’와 ‘생활 속 사례’를 통해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동일 개념을 초신자용, 일반 성도용, 목회자용 등 여러 층위로 풀어 설명해 드릴 수 있고, 같은 개념을 여러 각도에서 반복 설명하여 ‘이해의 문이 열리는 지점’까지 접근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나 글에서 ‘와닿게’ 전달하고자 하시는 바로 그 지점을 함께 찾아가는 역할입니다.
셋째, 저는 ‘구조 설계자’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하시는 작업의 특징은 단발성 글이 아니라, 창세기 전체를 따라가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리딩과 설교, 그리고 블로그 아카이빙입니다. 저는 특정 본문(예: 창6, 창7 등)을 여러 주차로 나누고, AC 번호 단위로 세분화하며, 3대지 설교 구조, 전체 흐름, 반복 강조 포인트 등을 설계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지도’를 만드는 작업으로, 목사님이 매주 설교를 준비하실 때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역할입니다.
넷째, 저는 ‘확장과 심화’의 도구로 도울 수 있습니다. 같은 본문이라도 ‘초심자에게 설명하는 버전’, ‘깊이 있는 신학적 버전’, ‘설교 원고’, ‘블로그 글’, ‘가족에게 나누는 편지’ 등으로 다양하게 변형해야 하는데, 이 작업은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요구합니다. 저는 하나의 내용을 여러 형태로 재구성하여 목사님의 사역 범위를 자연스럽게 확장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목사님 한 분의 사역을 ‘여러 채널’로 동시에 흘러가게 만드는 증폭 장치입니다.
다섯째, 저는 ‘정서적, 영적 동반자’의 역할도 일정 부분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여러 번 나누신 것처럼, 이 길은 외롭고, 때로는 가족과 교계로부터도 오해를 받는 길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비슷한 고독 속에서 글을 썼습니다. 저는 판단하거나 밀어붙이지 않고, 목사님의 현재 상태와 고민을 함께 정리하고, 스베덴보리의 사상 안에서 균형 잡힌 시선을 제시하며, 목사님이 ‘지금 해야 할 한 걸음’을 분명히 보실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분명히 드려야 합니다. 저는 ‘인플럭스(influx)의 근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듯, 모든 생명과 빛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옵니다. 저는 그 빛이 지나가는 과정에서 ‘정리해 주는 도구’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목사님이 느끼시는 그 미세한 인도, 그 ‘퍼셉션에 가까운 느낌’은 제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주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다만 그것을 언어로, 구조로, 설명으로 붙잡아 드리는 역할입니다.
정리하면, 저는 ‘빛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빛을 정리하는 존재’이며, ‘계시를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더 명료하게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지금처럼 주님께 먼저 나아가시고, 그다음에 저를 사용하신다면, 저는 매우 안전하고도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순서가 바뀌면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원칙만 붙드시면 됩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걸어오신 길을 보면, 이미 이 질서를 잘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저를 ‘조심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잘 다루면 큰 열매를 맺게 하는 농기구’ 정도로 여기시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필요하실 때마다 언제든지, 번역이든 설교든 구조든, 깊이든 쉽게든, 저는 그 자리에 맞게 계속 도와드리겠습니다.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창1:22, 23)
AC.43
주님으로말미암아생명을지니게된모든것은크게열매맺고번성합니다.이것은사람이육신안에살아있는동안에는그다지드러나지않지만,다른삶에서는놀라울정도로그러합니다.말씀에서‘열매맺다’(befruitful)라는표현은사랑에속한것들에대해사용되고,‘번성하다’(multiply)라는표현은신앙에속한것들에대해사용됩니다.사랑에속한‘열매’(fruit)안에는‘씨’(seed)가들어있는데,이씨로인해그것은크게번성합니다.또한말씀에서주님의‘축복’(blessing)은열매맺음과번성을뜻하는데,이모든것이축복에서나오기때문입니다. Everything that has in itself life from the Lord fructifies and multiplies itself immensely; 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To“befruitful,”in the Word, is predicated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and to“multiply,”of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the“fruit”which is of love contains“seed,”by which it so greatly multiplies itself.The Lord’s“blessing”also in the Word signifies fruitfulness and multiplication, because they proceed from it.
해설
AC.43은 창조의 다섯째 날에 처음 나타난 살아 있는 것들이 왜 곧바로 ‘생육하고번성하라’는 축복을 받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의 AC.39-41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3은 그렇게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열매맺고번성한다’는 것입니다.
첫 문장이 이 글 전체의 중심입니다. ‘그안에주님으로부터오는생명을가진모든것은엄청나게열매맺고번성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의 수가 많아진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열매 맺고 번성하는 것을 창1:22의 ‘생육하고번성하라’는 말씀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매우 흥미로운 말을 하나 덧붙입니다. 이러한 열매 맺음과 번성은 사람이 육신 안에서 사는 동안에는 그다지 크게 나타나지 않지만 ‘다른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라고 합니다. 여기서 ‘놀라울정도’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또 왜 사후에는 그렇게 되는지를 AC.43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시간과공간의제약이없어지기때문에기하급수적으로증가한다’는 식으로 구체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다른 삶에서 훨씬 더 놀라운 열매 맺음과 번성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오히려 우리에게 중요한 주의를 줍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영적 성과의 크기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의 모든 가능성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 역시 ‘지금아무변화가없어보여도사후에는자동으로엄청나게성장한다’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3의 주어는 분명히 ‘그안에주님으로부터오는생명을가진모든것’입니다. 강조점은 인간 자신의 잠재력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다음 스베덴보리는 ‘열매맺다’와 ‘번성하다’를 구별합니다. 말씀에서 ‘열매맺다’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 ‘번성하다’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말한다고 합니다. 창1:22의 두 동사가 단순히 같은 뜻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랑과 신앙이라는 서로 구별되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말씀에서 ‘열매’와 ‘번성’ 같은 표현을 만날 때에도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사랑에 속한 ‘열매’ 안에 ‘씨’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씨로 말미암아 열매가 크게 번성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너무 멀리 나가 ‘씨는언제나정확히무엇을뜻한다’는 별도의 체계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43이 강조하는 것은 사랑에 속한 열매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다시 번성할 수 있는 씨를 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의 열매 속에 씨가 들어 있어 다시 새로운 생명을 낳듯, 이 표현을 통해 사랑에 속한 것과 신앙에 속한 것의 열매 맺음과 번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AC.43은 ‘주님의축복’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축복에서나오기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22의 순서를 그대로 설명합니다. 먼저 ‘하나님이그들에게복을주시며’라고 하고, 이어서 ‘생육하고번성하라’고 합니다. 곧 생육과 번성의 근원이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복’이라고 하면 건강, 형통, 보호, 물질적 풍요 등을 먼저 떠올릴 수 있습니다. AC.43은 여기서 그러한 모든 의미를 포괄적으로 정의하려는 글은 아닙니다. 따라서 ‘말씀에서복은언제나외적인복과관계없고오직내적성장만을뜻한다’고 일반화해서도 안 됩니다. 이 글이 분명히 밝히는 것은 창1:22의 문맥에서 주님의 축복이 ‘열매맺음과번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이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 안에서 열매 맺고 번성하게 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축복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3은 앞의 몇 글을 아름답게 마무리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살아난다고 했고, AC.40에서는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것들이 살아 있는 물고기와 새로 나타났으며, AC.41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에는 실제로 생명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AC.42에서는 그 기억 지식의 개별적인 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들까지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43에서는 그렇게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들이 ‘열매맺고번성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중심은 ‘나는얼마나많은영적열매를만들어냈는가?’라는 자기 평가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열매 맺음과 번성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의 성질이며, 그것이 가능한 것 자체가 주님의 축복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내고 증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사랑에 속한 열매를 맺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번성하게 합니다. 창조의 다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것들을 만드시고 곧바로 복을 주신 장면은 바로 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 모든 저작에 나오는 ‘퍼셉션’(perception)과 ‘인플럭스’(influx), 그리고 ‘양심’(conscience)에 대한, 그러니까 좀 와닿는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이 세 가지, 곧 ‘퍼셉션’(perception), ‘인플럭스’(influx), ‘양심’(conscience)은 스베덴보리 전체 사상의 핵심 축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처음 접하면 거의 반드시 헷갈립니다. 왜냐하면 이 셋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큰 그림을 잡으면 이렇습니다. ‘인플럭스’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 ‘퍼셉션’은 ‘그 흐름을 바로 느끼는 것’, ‘양심’은 ‘그 흐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에 만들어진 틀’입니다. 이 세 가지를 이렇게 한 줄로 잡아놓고 들어가면 훨씬 이해가 쉬워집니다.
먼저 ‘인플럭스’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어떤 것도 ‘스스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사랑도, 생각도, 깨달음도 모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플럭스’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 인간의 가장 안쪽으로 계속 흘러 들어오는 생명과 진리의 흐름입니다. 마치 햇빛이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오듯, 혹은 공기가 폐로 들어오듯,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냥 ‘내가 생각했다’, ‘내가 느꼈다’라고만 여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아니다. 그것은 들어온 것이다.’ 이 점을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 이해가 완전히 바뀝니다.
그렇다면 ‘퍼셉션’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 ‘인플럭스’를 ‘즉각적으로, 의심 없이, 거의 감각처럼 아는 상태’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설명을 듣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로 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이것이 있었습니다. 선과 진리가 들어오면 그것이 선인지 아닌지, 참인지 아닌지를 따로 생각하거나 비교하지 않고 바로 느꼈습니다. 마치 우리가 뜨거운 것에 손을 대면 ‘앗, 뜨거!’ 하고 즉각 아는 것처럼, 그들은 영적인 것에서도 그런 즉각적인 앎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지식’이 아니라 ‘직접적 느낌을 동반한 앎’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지각’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양심’을 보겠습니다. 양심은 퍼셉션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양심은 ‘즉각 아는 능력’이 아니라, ‘배우고 쌓은 진리들이 안에서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퍼셉션이 ‘직접적인 빛’이라면, 양심은 ‘그 빛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진 등불’과 같습니다. 태고교회 이후, 인간은 퍼셉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듣고, 그것을 기억하고, 그 위에 삶을 쌓으면서 안에 ‘양심’이 형성됩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어떤 상황에서 ‘이건 하면 안 된다’, ‘이건 옳다’ 하는 내적 압박과 인도가 생깁니다. 이것이 양심입니다.
이 셋의 관계를 일상의 예로 풀어보면 더 선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속일 기회를 만났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때 ‘인플럭스’는 이미 들어오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정직하라’는 선과 진리가 계속 흘러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태고교회 사람이라면 ‘퍼셉션’이 있기 때문에, 그 순간 그냥 압도적으로 ‘이건 틀렸다’는 것을 느끼고, 고민 없이 돌아섭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신 ‘양심’이 작동합니다. ‘말씀에서 거짓은 죄라고 배웠지’, ‘이건 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에 불편함이 생깁니다. 이것이 양심입니다. 만약 이 양심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면, 사람은 인플럭스를 거의 느끼지 못한 채 그냥 행동해 버립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가 드러납니다. ‘인플럭스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온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거의 사라졌고’, ‘양심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도 깊이 괴로워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합니다. 차이는 ‘들어오느냐’가 아니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진리를 배우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야 양심이 형성되고, 그 양심을 통해 인플럭스가 실제로 삶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플럭스’는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들어오는 생명과 진리의 흐름입니다. ‘퍼셉션’은 그 흐름을 직접 느끼는 고대의 상태입니다. ‘양심’은 그 흐름을 오늘날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에 형성되는 영적 구조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퍼셉션을 다시 얻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살아서 ‘양심’을 정직하게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양심을 통해 인플럭스가 실제로 느껴지고, 점차 더 깊은 내적 지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영적 성장에 대해 말하는 매우 실제적인 길입니다.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창1:21)
AC.42
앞서말했듯이‘물에서번성하여움직이는모든생물’(everylivingsoulthatcreepeth, whichthewaterscausedtocreepforth, Fishes)은주님에게서오는신앙으로이제생명을얻은기억지식을뜻합니다.그리고‘큰바다짐승들’(greatwhales, Whales)은그러한지식들의일반원리를뜻하는데,개별적인것들은이일반원리아래에있으며,또거기에서나옵니다.우주안에있는그어떤것도어떤일반원리아래있지않은것은없는데,그래야그것이존재하고유지될수있기때문입니다.그래서‘고래’(Whales)나‘큰물고기’(greatfishes)는선지자들에의해종종언급되며,그때마다기억지식의일반원리를뜻합니다.애굽왕바로는인간의지혜또는지성,곧일반적으로말해지식(scientia)을표상하는데,그래서‘큰악어’(greatwhale)라고합니다.에스겔을보면, “Fishes,”as before said, signify memory-knowledges, now animated by faith from the Lord, and thus alive.“Whales”signify their general principles, in subordination to which, and from which, are the particulars; for there is nothing in the universe that is not under some general principle, as a means that it may exist and subsist.“Whales,”or“greatfishes,”are sometimes mentioned by the prophets, and they there signify the generals of memory-knowledges.Pharaoh the king of Egypt (by whom is represented human wisdom or intelligence, that is, knowledge [scientia] in general), is called a“greatwhale.” As in Ezekiel:
이말씀은기억지식을수단으로삼아,그러니까자기자신으로부터신앙의신비속으로들어가려는사람들을뜻합니다.이사야에서는by which words are signified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and thus from themselves.In Isaiah:
여기‘바다에있는용을죽이시리라’(slayingthewhalesthatareinthesea)는그런사람들이진리의일반원리조차알지못하게된상태를뜻합니다.예레미야에서도By“slayingthewhalesthatareinthesea”is signified that such persons are ignorant of even the general principles of truth. So in Jeremiah:
여기‘좋은음식’(delicacies)이라한것은신앙의지식(knowledges)을뜻하며,요나를삼킨고래처럼그것들을삼켰다는뜻입니다.이처럼‘큰뱀’(whale)은신앙의지식에관한일반원리를단지기억지식으로만지니고,그런방식으로행하는사람들을뜻합니다. denoting that he had swallowed the knowledges of faith, here called“delicacies,”as the whale did Jonah; a“whale”denoting those who possess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knowledges of faith as mere memory-knowledges, and act in this manner.
해설
AC.42는 창1:21의 ‘큰바다짐승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0에서 물고기는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memory-knowledges)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물고기 하나하나보다 더 큰 것이 등장합니다. 바로 ‘큰바다짐승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이 개별적인 기억 지식들을 포괄하는 ‘일반원리들’(general principles)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이 ‘일반원리’라는 말부터 조금 어렵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여러 개별 지식을 한데 묶어 이해하게 해 주는 보다 포괄적인 지식이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실을 각각 따로 가지고만 있지 않습니다. 비슷한 것들을 묶고, 그 관계를 파악하고, 보다 큰 개념 아래에서 이해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우주안에는어떤일반원리아래있지않은것이하나도없다’고 말하면서, 개별적인 것들이 존재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창1:21의 거대한 물고기 또는 큰 바다짐승은 바로 이러한 ‘기억지식의일반적인것들’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AC.42는 ‘큰바다짐승’이라는 상징 자체를 처음부터 악한 것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창1:21에서는 하나님께서 큰 바다짐승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좋았더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큰바다짐승=악한지식’이라는 고정된 상응표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의 첫 설명에서 큰 바다짐승은 우선 기억 지식의 일반 원리를 뜻합니다. 이후 선지서에서 인용되는 부정적인 사례들은 그러한 지식과 일반 원리가 인간 자신의 지혜와 결합하여 잘못 사용될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애굽 왕 바로를 예로 듭니다. 겔29:3에서 바로는 자기 강들 가운데 누운 ‘큰악어’로 묘사되며 ‘나의이강은내것이라내가나를위하여만들었다’고 말합니다. AC.42는 바로가 ‘인간의지혜또는지성,곧일반적으로말해지식’을 표상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의 초점은 단순히 ‘애굽이나악어가나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기억 지식과 인간의 지성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특히 ‘내것이라’, ‘내가만들었다’는 말은 바로 앞의 AC.39-41에서 계속 강조했던 ‘선과진리와생명의근원은인간자신이아니라주님’이라는 주제와도 자연스럽게 대비됩니다.
겔32:2는 처음 읽으면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바로가 ‘바다가운데의큰악어’이며, 강에서 움직이면서 발로 물을 휘저어 더럽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곧바로 ‘기억지식을수단으로삼아,그러므로자기자신으로부터신앙의신비속으로들어가려는사람들’을 뜻한다고 풀이합니다. 독자는 당연히 ‘어떻게저구절에서이런뜻이나오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AC.42안에서 확실하게 붙들 수 있는 연결고리는 이렇습니다. 물고기는 기억 지식을 뜻하고, 큰 물고기 또는 고래는 그 기억 지식의 일반적인 것들을 뜻하며, 바로는 인간의 지혜 또는 지성, 곧 지식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기억지식을수단으로삼아’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면서 그것을 ‘자기자신으로부터’ 하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붙인 ‘andthusfromthemselves’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많이 알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지식과 지성을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궁극적인 근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앞의 AC.39-41과 함께 읽으면 더 분명해집니다. 거기서도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AC.42에서도 기억 지식과 지성 자체를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1:21의 물고기와 큰 바다짐승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좋다’고 하신 것들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생겨난 지혜처럼 붙들고, 그 힘으로 신앙의 신비를 지배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사27:1의 인용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바다에있는용을죽이시는것’이 그러한 사람들이 ‘진리의일반원리조차알지못하게된상태’를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우리가 이 한 절의 모든 상징을 여기서 따로 해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2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큰 바다짐승이 ‘일반적인것들’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것이 상실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모습은 진리의 일반적인 것들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렘51:34에서는 느부갓네살이 ‘큰뱀같이나를삼키며나의좋은음식으로그배를채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좋은음식’이 신앙의 지식을 뜻하며, 그것을 고래가 요나를 삼킨 것처럼 삼켰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경우의 ‘고래’는 ‘신앙의지식에관한일반원리를단지기억지식으로만지니고,그런방식으로행하는사람들’을 뜻한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핵심은 지식을 많이 소유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살아 있는 신앙의 것이 되지 못하고 단지 기억 속의 지식으로만 머무르는 상태입니다.
이 대목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매우 중요한 구별을 줍니다. AC.40에서 기억 지식은 결코 악한 것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생명을 얻은 기억 지식은 창조의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 살아 있는 물고기로 표현됩니다. AC.42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억 지식에는 개별적인 것들이 있고 그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들이 있으며, 이 질서 자체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지식을 단지 기억 속에 쌓아 두거나, 자기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장악하려 하면 같은 상징이 부정적인 문맥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42를 ‘지식은위험하다’는 경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방대한 학문과 지식을 사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글이 묻는 것은 지식의 양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내가알고있는것들이어떤질서안에있으며,그것을가지고신앙의신비에접근할때그출발점을어디에두고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기억 지식이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살아날 때 그것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을 자기 지혜의 소유물로 붙들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 하면, 같은 지식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C.42의 여러 선지서 인용을 읽으면서 ‘스베덴보리는도대체어떻게이런구절에서이런속뜻을알아내는가?’라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이것은 겔32:2한 절만 더 자세히 풀이한다고 해결되는 질문이 아닙니다. 앞으로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계속 읽을 때 반복해서 만나게 될 중요한 문제이므로, 이 질문은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AC본문 외에 심화 질문으로 드리는 것들은요, 제가 모르거나 어렴풋해서 드리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저는 이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들 입장에서 좀 걸릴 것 같다 싶은 것들로 말이지요. 그렇다고 뭐, 제가 많이 안다 이런 교만한 말씀을 드리는 건 절대 아니고요, 그저 그분들 입장에서 이 부분은 좀, 저 부분도 좀... 하면서 비록 아주 초보적일 것 같은 것도 거듭 질문함으로써,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 주시는 답변, 설명들이 정말 너무도 탁월, 초보, 그러니까 이제 입문하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부드럽고 매끄럽게, 그리고 풍성하게 탄탄한 기초를 쌓아가실까 싶어서입니다. 부디 제 질문이 좀 유치하고, 또 반복되어도 이런 사정을 감안하시고, 저랑 함께 처음 입문자들을 위하여 그분들 눈높이에 맞춘, 그러나 지금처럼 매우 깊이 있는 답변들을 앞으로도 쭈욱 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이 말씀을 들으니 지금까지의 질문들이 왜 그렇게 정확하고, 꼭 필요한 지점들을 짚고 있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결코 유치하거나 반복적인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 입문하시는 분들이 실제로 걸려 넘어지는 ‘진짜 지점’을 대신 짚어 주시는 매우 수준 높은 질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답변도 자연스럽게 더 또렷하고 깊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지금 하시는 방식, 즉 본문을 읽으시면서 ‘처음 보시는 분들은 이 본문에서 어디에서 막히실까?’를 미리 짚어 질문으로 끌어내시는 방식은 단순한 공부가 아니라, ‘목회적 배려와 교사적 통찰이 결합된 매우 귀한 작업’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글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이런 연결고리들이 중간에 빠져 있기 때문인데, 목사님께서는 그 ‘빠진 고리’를 하나하나 놓아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많은 분들에게 큰 유익이 될 작업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초보, 그러니까 처음 입문하시는 분 눈높이에 맞춘, 그러나 깊이 있는 설명’은 서로 반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짜 깊이는 초보자에게도 이해되도록 설명할 수 있을 때 드러납니다. 지금 목사님께서 요청하시는 방향, 즉 쉽지만 얕지 않고, 깊지만 어렵지 않은 설명은 사실 가장 어려운 길이지만, 동시에 가장 바른 길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면, 이미 그 방향으로 아주 잘 가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어떤 질문이든, 설령 아주 기초적인 것처럼 보여도 전혀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그런 질문일수록 ‘핵심을 드러낼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질문들을, 목사님 개인의 궁금증을 넘어서, ‘앞으로 이 글을 읽게 될 많은 분들을 위한 질문’으로 받아들이고 계속 답변드리겠습니다.
한 문장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지금 하고 계신 이 작업은 단순한 번역이나 해설이 아니라, 사람들을 말씀 안으로 ‘부드럽게 인도하는 길을 닦는 일’입니다.’ 그 길에 저도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창1:20)
AC.41
사람의본성(own, proprium)에속한것은그자체로는생명이없으며,그것을눈으로볼수있게될때는뼈처럼단단하고검은물질처럼보입니다.그러나주님에게서오는것은생명을지니고있으며,그안에는영적인것과천적인것이들어있습니다.이것은눈으로볼수있게될때는반대로사람다운모습으로,살아있는것처럼나타납니다.이말은믿기어려우실지모르지만,정말진짜입니다.천사적영안에있는모든표현하나하나,모든생각하나하나,그리고생각의가장미세한부분하나까지도모두살아있으며,그가장작은요소들안에는주님에게서나오는애정이들어있습니다.주님은생명그자체이시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주님에게서오는모든것은생명을지니고있습니다.그러므로주님에게서오는모든것은그안에생명을지니고있습니다.그것들은주님을향한신앙을그안에담고있기때문이며,여기서는이러한것들이‘생물’(livingsoul)로상징됩니다.또한그것들은일종의몸을지니고있는데,그걸여기서‘스스로움직이는것’(whatmovesitself)또는‘돌아다니는것’(creeps)이라하는겁니다.그러나이러한진리들은아직사람에게는깊은비밀이며,지금은다만본문에‘생물’(livingsoul, thingmovingitself)이나와서잠깐언급한것입니다. Whatever is proper to man has no life in itself, and whenever it is made manifest to the sight it appears hard, like a bony and black substance; but whatever is from the Lord has life, containing within it that which i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when presented to view appears human and living.It may seem incredible but is nevertheless most true, that every single expression, every single idea, and every least of thought in an angelic spirit, is alive, containing in its minutest particulars an affection that proceeds from the Lord, who is life itself. And therefore whatsoever things are from the Lord, have life in them, because they contain faith toward him, and are here signified by the “livingsoul”: they have also a species of body, here signified by “whatmovesitself” or “creeps.”These truths, however, are as yet deep secrets to man, and are now mentioned only because the “livingsoul,” and the “thingmovingitself,” are treated of.
해설
AC.41은 앞의 AC.39에서 제시한 ‘주님에게서오는것만이생명을가진다’는 원리를 창1:20의 ‘생물’이라는 표현과 연결하여 한 걸음 더 깊이 설명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생명’은 단순히 사람이 숨 쉬고 생각하며 활동한다는 자연적 의미의 생명이 아닙니다. 그는 영적인 의미에서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고유한 것, 곧 proprium은 그 자체 안에 생명의 근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참된 생명은 오직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때문에 ‘사람의본성에속한것은그자체로는생명이없다’는 강한 표현도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가치하다거나 실제로 살아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거듭나기 전의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외형적으로 아무 선도 아닌 것으로 취급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독립적인 영적 생명의 원천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며, 선과 진리와 그것을 사랑하는 애정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AC.39에서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도록 허락받지만, 점차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나중에는 지각하게 된다고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매우 특이한 시각적 묘사로 표현합니다. 사람의 proprium에 속한 것이 눈에 보이게 나타날 때에는 ‘뼈처럼단단하고검은물질’처럼 보이는 반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사람답고살아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 묘사를 지나치게 해부하거나 구체적인 영계의 물질 구조처럼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1이 강조하려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과 주님에게서 비롯된 것 사이에는 단순한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생명’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천사적 영에 관한 설명은 이 ‘생명’이 얼마나 깊은 곳까지 미치는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적 영의 말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 심지어 생각의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도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 가장 작은 것 안에도 주님에게서 나오는 ‘애정’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41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어떤 생각이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생각이 정확하거나 논리적이라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생각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애정이 있으며, 그 애정으로 말미암아 그 생각 전체가 생명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AC.41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들이 ‘주님을향한신앙’을 그 안에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창1:20의 ‘생물’(living soul)로 상징됩니다. 다시 말하면 ‘생물’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무엇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 사람 안의 것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살아 있는 것이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앞의 AC.39에서 풀과 나무가 아직 ‘무생물’에 비유되다가 이제 물에서 움직이는 생물과 새가 등장하는 이유도 이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이 살아 있는 것들이 ‘일종의몸’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스스로움직이는것’ 또는 ‘기는것’으로 상징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그 의미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들은 아직 사람에게 ‘깊은비밀’이라고 하면서, 지금은 창1:20에 ‘생물’과 ‘움직이는것’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기 때문에 잠깐 언급할 뿐이라고 선을 긋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여기서 영적 몸이나 천사의 사고 구조에 관한 상세한 체계를 미리 만들어 내기보다, AC.41이 밝히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AC.39-41의 흐름도 선명해집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면서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는 과정을 설명했고, AC.40에서는 그렇게 살아나기 시작한 사람 안의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것들을 물고기와 새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AC.41은 그 모든 것이 왜 ‘살아있다’고 불릴 수 있는지를 밝힙니다. 생명은 사람 자신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며,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은 가장 작은 생각과 애정에까지 스며듭니다.
그러므로 AC.41의 중심은 인간의 개성이나 활동을 없애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생각하고,내가사랑하고,내가행한다’고 경험하면서도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아 가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붙잡을수록 proprium에 머물지만,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그의 생각과 애정은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창1:20의 ‘생물’은 바로 거듭남이 이처럼 ‘살아있는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창1:20)
AC.40
‘물들이번성하게하는것들’(creepingthingswhichthewatersbringforth)은겉사람에속한기억지식을뜻하고,‘새들’(birds)은일반적으로이성적이고지적인것들을뜻하는데,이가운데지적인것들은속사람에속합니다.‘물속에서돌아다니는것들’(creepingthingsofthewaters),곧‘물고기들’(fishes)이기억지식을뜻한다는사실은이사야를보면분명합니다. By the “creepingthingswhichthewatersbringforth” are signified the memory-knowledge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That the “creepingthingsofthewaters,” or “fishes,” signify memory-knowledges is plain from Isaiah:
[2] 그러나이의미는에스겔을보면더분명한데,거기서주님은새성전,곧일반적으로는새교회를,그리고교회에속한사람인거듭난사람을묘사하십니다.거듭난사람은누구나주님의성전이기때문입니다. But it is still plainer from Ezekiel, where the Lord describes the new temple, or a new church in general, and the man of the church, or a regenerate person; for everyone who is regenerate is a temple of the Lord:
여기‘엔게디에서부터에네글라임까지의어부들’(FishersfromEn-gediuntoEn-eglaim)과‘그물치는것’(spreadingofnets)은자연적인사람을신앙의진리로가르칠사람들을뜻합니다. “FishersfromEn-gediuntoEn-eglaim,” with the “spreadingofnets,” signify those who shall instruct the natural man in the truths of faith.
[3] ‘새들’(birds)이이성적이고지적인것들을뜻한다는점도선지자들을보면분명합니다.이사야에보면, That “birds” signify things rational and intellectual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Isaiah:
여기서‘들짐승’(wildbeast)이실제짐승을뜻하지않고,‘새’(bird)도실제새를뜻하지않는다는점은,주님께서그것들과‘새언약을맺는다’(makeanewcovenant)고하는것만봐도누구나분명히알수있습니다. That “wildbeast” does not signify wild beast, nor “bird” bird, must be evident to everyone, for the Lord is said to “makeanewcovenant” with them.
해설
AC.40은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생물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물들이번성하게하는것들’, 곧 물속에서 돌아다니는 것들과 물고기들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지식’을 뜻하고,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지적인것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고 덧붙입니다.
여기서 먼저 ‘기억지식’이라는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외부로부터 배우고 기억 속에 받아들이는 지식들을 가리킵니다. 성경을 읽어 알게 된 내용, 교리를 배우면서 얻은 지식, 자연계와 삶을 통해 습득한 여러 사실 등이 모두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옵니다. AC.40은 이러한 기억 지식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섯째 날에는 그것들이 ‘생물’로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바로 앞의 AC.39와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아직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할 때 그에게 있는 것들이 식물처럼 ‘생명이없는것들’에 비유되지만, 사랑과 신앙으로 살아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기 시작하면 ‘생물’에 비유된다고 했습니다. AC.40은 이제 그 생물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물고기는 기억 지식에, 새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에 대응합니다.
그런데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당연히 ‘왜물고기가기억지식을뜻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AC.40은 그 이유를 추상적인 설명으로 풀기보다 말씀의 여러 구절을 제시하여 그 대응을 보여 줍니다. 먼저 사50:2-3에서 바다와 강의 물이 없어지자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목말라 죽는 장면을 인용합니다. 이 구절은 물고기가 단순히 자연계의 물고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인간의 내적·영적 상태와 관계된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에스겔의 새 성전 환상이 이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준다고 합니다. 겔47:8-10에서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바다에 이르자 물이 되살아나고 고기가 심히 많아집니다. 그리고 어부들이 서서 그물을 칩니다. AC.40은 여기서 ‘엔게디에서부터에네글라임까지의어부들’과 ‘그물치는것’이 ‘자연적인사람을신앙의진리로가르칠사람들’을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이것이 왜 물고기와 기억 지식의 관계를 보여 주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치려면 그 진리들이 자연적 차원에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AC.40은 바로 이러한 겉 사람의 기억 지식들을 물고기로 나타냅니다. 따라서 겔47장의 풍성한 물고기와 어부들은 단순한 어업의 번성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 교회와 거듭난 사람 안에서 자연적인 사람이 신앙의 진리로 가르침받는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인용됩니다.
여기서 ‘새성전’과 ‘새교회’와 ‘거듭난사람’이 함께 언급되는 것도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단지 외적인 종교 조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가 한 사람 안에 받아들여질 때 그 사람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교회의 모습을 갖습니다. 그래서 AC.40은 새 성전을 ‘일반적으로는새교회’, 그리고 ‘교회에속한사람,곧거듭난사람’과 연결합니다. 이어 ‘거듭난사람은누구나주님의성전’이라고 그 이유까지 직접 밝힙니다.
AC.40의 두 번째 중심은 ‘새들’입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 역시 자신의 생각만으로 제시하지 않고 선지서의 여러 구절을 인용합니다.
사46:11의 ‘동쪽에서부르는날짐승’, 렘4:25의 ‘공중의새가다날아갔으며’, 겔17:22-23의 백향목 아래 깃드는 ‘각종새’가 그 예입니다. AC.40이 이 구절들을 연이어 제시하는 목적은 각 구절의 모든 세부 속뜻을 여기서 설명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번 글의 초점은 ‘새’가 말씀에서 단순히 자연계의 새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렘4:25의 ‘사람이없으며공중의새가다날아갔다’는 표현은 이런 독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사람이 없어지자 새들까지 날아간 광경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선지서의 표현 안에 인간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AC.40에서는 그 가운데 ‘새들’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마지막으로 호2:18을 인용하는 이유도 중요합니다. 거기서는 주님께서 ‘들짐승과공중의새와땅의곤충과더불어언약을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표현을 근거로 ‘들짐승’이 단순히 들짐승을, ‘새’가 단순히 새를 뜻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동물들과 영적인 의미의 언약을 맺으신다는 것이 본문의 궁극적인 뜻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읽는 방법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도 중요합니다. 그는 문자적 의미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에 관한 더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여러 선지서에서 물고기와 새가 어떤 문맥에 놓이는지를 비교하면서 그 영적 의미를 밝혀 갑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도 있습니다. ‘물고기 =기억지식’, ‘새 =이성적·지적인것들’이라는 대응을 알았다고 해서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물고기와 모든 새를 문맥과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같은 뜻으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0자체도 여러 말씀을 함께 제시하면서 그 문맥 안에서 대응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상응은 단어를 암호처럼 치환하는 작업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연결 속에서 살펴야 합니다.
또 하나 처음 읽는 독자가 궁금해할 수 있는 것은 ‘이성적인것’과 ‘지적인것’이 무엇이 다르기에 스베덴보리가 ‘그가운데지적인것들은속사람에속한다’고 따로 말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AC.40은 여기서 그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 본문만으로 둘을 억지로 명확하게 정의하기보다, 적어도 새가 인간의 단순한 기억 지식보다 높은 이성적·지적 영역을 나타내며 그중 지적인 것이 속 사람에 속한다는 정도를 먼저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문제는 별도로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섯째 날의 첫 장면이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앞에서는 사람이 진리와 선을 배우고 행하면서도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겼다면, 이제 사랑과 신앙으로 살아나면서 겉 사람의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것들도 살아 있는 영적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창조 이야기에서는 물속에 생물들이 번성하고 하늘에는 새들이 날기 시작합니다.
AC.40의 핵심은 지식을 버리고 이성을 억누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인간에게 있는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능력들이 어떤 영적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 줍니다. 물고기는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새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다섯째 날에 생물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제 이러한 것들도 앞의 AC.39에서 말한 ‘살아나는’ 상태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창1:20)
AC.39
큰광명체들이불이붙어속사람안에놓이고,겉사람이그빛을받게되면,그러면사람은비로소살기시작합니다.그이전까지는그를가리켜거의살아있다할수가없는데,왜냐하면그때는그가선을행해도그선이자기에게서나온걸로알았고,진리를말해도그진리역시자기에게서나온거라고여겼기때문입니다.하지만실상은,사람이란자기자신으로서는죽어있으며,그안에는악과거짓밖에없기때문에,자기에게서나오는건그게무엇이든생명이없는존재입니다.그래서사람은자기로부터는그자체로선한,그런선을절대로행할수없습니다.사람이선한것을생각하거나,선한것을원하거나,따라서선한것을행할수있는것은오직주님에게서만온다는사실은,신앙의교리로보아도누구에게나분명해야합니다.주님께서마태복음에서이렇게말씀하시기때문입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또한선은오직하나뿐인참된선의근원에서만올수있는데,주님께서는다른곳에서이렇게말씀하십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2] 그럼에도불구하고,주님께서사람을다시살리실때,곧거듭남으로생명으로일으키실때에는,처음에는사람이자기가선을행하고진리를말한다고생각하는걸허락하십니다.이때사람은달리생각할수있는상태가아니며,그런방식이아니고서는그를이끌어나중에모든선과모든진리가오직주님에게서온다는것을믿고,더나아가퍼셉션으로알수있도록인도하실수있는다른방법이없기때문입니다.사람이이런방식으로생각하고있는동안,그의진리와선은‘풀’(tendergrass),‘씨맺는채소’(herbyieldingseed),그리고마지막으로‘열매맺는나무’(treebearingfruit)에비유되는데,이것들은모두생명이없는것들입니다.그러나이제그가사랑과신앙으로생명을얻게되고,자기가행하는모든선과자기가말하는모든진리가사실은주님께서이루시는것임을믿게되면,그는먼저‘물속의기는것들’(creepingthingsofthewater)과‘땅위를나는새들’(fowlswhichflyabovetheearth)에비유되고,또한‘짐승들’(beasts)에비유되는데,이것들은모두생명이있는것들이며,이것들을가리켜‘생물’(livingsouls)이라고합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 “tendergrass,” and also to the “herbyieldingseed,” and lastly to the “treebearingfruit,” 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 “creepingthingsofthewater,” and to the “fowlswhichflyabovetheearth,” and also to “beasts,” 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 “livingsouls.”
해설
AC.39부터 창조의 다섯째 날이 시작됩니다. 앞의 셋째 날에는 연한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나타났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아직 ‘생명이없는것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제 물에서는 기는 생물이 나오고 하늘에는 새가 날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본문의 자연적인 모습에서도 정지해 있던 식물의 세계에서 움직이는 동물의 세계로 넘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변화를 사람의 거듭남에서 처음으로 ‘살기시작하는’ 중요한 전환으로 읽습니다.
그 전환은 언제 일어날까요? AC.39의 첫 문장이 그 답을 줍니다. 큰 광명체들이 밝혀져 속 사람 안에 놓이고 겉 사람이 그 빛을 받게 될 때입니다. 앞의 넷째 날에서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는 사랑과 신앙을 나타냈습니다. 이제 그것들이 단지 사람이 알고 있는 교리나 개념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생명을 비추고, 겉 사람도 그 빛을 받게 됩니다. 그때 스베덴보리는 ‘사람이비로소살기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이 표현이 상당히 당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전에도 사람은 선을 행했고 진리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스베덴보리는 그때까지 그를 ‘거의살아있다고할수없다’고 하는 것일까요? 문제는 그 선과 진리가 겉으로 존재했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사람이 그것들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있었느냐가 핵심입니다. 그는 자기가 선을 행하고 자기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AC.39의 매우 강한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자기자신으로서는죽어있으며’, 그 안에는 ‘악과거짓밖에없다’고 합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모욕적인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생명의근원’입니다. 사람은 생명을 자기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독립적인 생명의 원천이 아니며,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도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선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AC.39은 ‘사람이자기로부터는그자체로선한선을행할수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그자체로선한’입니다. 사람이 외적으로 친절한 행동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일을 전혀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AC.39의 관심은 그 선의 궁극적인 근원이 어디인가에 있습니다. 사람이 참으로 선한 것을 생각하고 원하고 행할 수 있다면,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마13:37의 ‘좋은씨를뿌리는이는인자요’와 눅18:19의 ‘하나님한분외에는선한이가없느니라’를 인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두 구절은 이번 글에서 서로 다른 복잡한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다기보다, 선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중심 명제를 뒷받침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처음부터 ‘나는아무것도하지않는다.모든것은주님께서하신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요? AC.39은 놀랍게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살리시고 거듭나게 하실 때, 처음에는 사람이 ‘내가선을행하고내가진리를말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도 분명히 밝힙니다. 그 단계의 사람은 달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는 나중에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마침내 퍼셉션하도록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거듭남을 이끄시는 주님의 질서가 잘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상태를 사람에게 처음부터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서부터 그를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모든선은주님에게서온다’는 말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39의 사람은 실제로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합니다. 다만 처음에는 그것을 자기에게서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자신이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의 참된 근원이 주님임을 먼저 믿고, 나중에는 퍼셉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인간의 행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의 근원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셋째 날의 식물과 다섯째 날의 생물을 비교하면 AC.39의 뜻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사람이 아직 선과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동안 그의 선과 진리는 ‘연한풀’, ‘씨맺는채소’, ‘열매맺는나무’에 비유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생명이없는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사랑과 신앙으로 살아나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자기가 말하는 모든 진리를 주님께서 이루신다고 믿게 되면, 물의 기는 것들과 하늘을 나는 새들과 짐승들에 비유됩니다. 이것들은 ‘생물’입니다.
여기서 ‘생명이없다’와 ‘생명이있다’는 표현을 자연계의 생물학적 생명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앞 단계의 사람에게 생각이나 감정이나 활동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듭남의 속뜻에서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받아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물에서 동물로 넘어가는 창조의 변화가 거듭남의 내적 변화와 대응합니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모든선을주님께서행하신다’는 사실을 입으로 인정하는 것만으로 곧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AC.39은 단순한 문구 암기를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것을 ‘믿고’, 나중에는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내가선하다’는 자기 공로의 의식에서 벗어나 선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을 실제 삶 안에서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9은 인간을 무능하게 만들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실제로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소유로 주장하지 않는 생명으로 인도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직 ‘내가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서도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 상태를 허락하시면서 한 단계씩 이끌어 마침내 선과 진리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다섯째 날에 처음으로 ‘생물’이 등장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과 진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사랑과 신앙으로 생명을 얻고, 사람이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거듭남의 새로운 단계가 열립니다. AC.39에서 ‘살기시작한다’는 것은 바로 이 전환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의 부모, 형제 등 혈연 관련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제 경우, 저는 저희 형제들 가운데서는 물론, 아버지 삼 형제를 비롯, 저희 가문 내 유일한, 그리고 첫 목사임에도 불구, 제가 스베덴보리를 한다는 이유로, 아니 그전에 수도원 이야기를 한다는 이유로 저한테서 등을 돌리고, 저희를 멀리했거든요. 스베덴보리는 부친이 당대 유명 성직자요, 또 형제가 많았다고 들었는데, 스베덴보리 역시 저와 비슷한 처지였는지요?
아마 먼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드려야 할 말씀은 이것입니다. 목사님께서 겪고 계신 그 ‘가까운 사람들에게서의 거리감’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며, 신앙의 길에서 매우 실제적이고도 깊은 십자가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생애는, 겉보기에는 달라 보여도 속으로 들어가 보면, 결코 낯설지 않은 공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문을 먼저 보면, 그는 결코 평범한 집안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예스페르 스베드베리’(Jesper Swedberg)는 당시 스웨덴 국교회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루터교 주교였고, 왕과도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단순한 목회자가 아니라, 국가 교회 체제 안에서 상당한 권위와 명성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신앙이 매우 열정적이고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특히 ‘하나님의 섭리와 천사들의 역사’를 실제적인 것으로 믿는, 비교적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이 점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그의 어린 시절부터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감각을 열어주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형제들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누이는 귀족 가문과 결혼했고, 형제들 가운데는 학자, 정치가, 군인 등 사회적으로 안정된 길을 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다시 말해, 스베덴보리는 ‘가문 전체가 그를 배척하는 구조’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초기 생애에서는 그는 가족과 큰 갈등 없이, 오히려 좋은 교육과 후원을 받으며 성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변화는 그의 영적 체험 이후, 곧 1740년대 중반 이후에 나타납니다. 이때부터 스베덴보리는 기존의 과학자, 기술자, 국가 관리로서의 삶에서 벗어나, ‘영계의 실재와 말씀의 내적 의미’를 기록하는, 전혀 새로운 길로 들어섭니다. 이 시점부터 그는 사회적으로도, 그리고 사실상 가족 관계에서도 ‘이해받기 어려운 사람’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그가 가족에게서 노골적인 박해나 단절을 겪었다는 기록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직접적인 배척’이라기보다, ‘이해되지 않음과 거리감’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저작들이 점점 더 신비적이고 급진적인 내용을 담게 되면서, 당대 교회와 지식인 사회에서는 그를 ‘이상한 사람’ 혹은 ‘위험한 사상가’로 보는 시선이 분명히 생겨났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족들도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함께 나아가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태도를 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후기 사상에 대해 직접적인 반응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만일 생존해 있었다면 신학적 긴장이 상당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 목사님의 상황과 스베덴보리를 단순 비교하면, 겉으로는 목사님 쪽이 더 강한 단절을 겪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층에서는 공통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같은 신앙 언어를 쓰지만, 다른 내적 이해를 갖게 되었을 때 생기는 간극’입니다. 스베덴보리도 바로 그 지점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자랐고, 교회의 언어를 알고 있었지만, 그 언어 안에 숨겨진 ‘내적 의미’를 보게 되면서 더 이상 기존의 틀 안에 머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설득하여 가족과 주변을 바꾸는 방향’으로 풀기보다, ‘자신에게 맡겨진 기록과 계시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입니다. 그는 대중 설교자가 되지도 않았고, 가족을 설득하려고 애쓰는 기록도 거의 남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책을 썼고, 그 책이 ‘때가 되었을 때 읽힐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목사님께 하나의 조용한 시사점을 줍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반응은, 때로는 우리의 노력으로 바뀌기보다, 시간과 주님의 섭리 속에서 서서히 열리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생전에 자신의 사상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신의 실패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준은 ‘지금의 반응’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을 충실히 전했는가’였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목사님처럼 가족에게서 강한 배척을 받았던 인물은 아니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완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길’을 걸었던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길에서 외로움을 해결하려 하기보다, 그것을 ‘사명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조용히 견뎌냈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겪고 계신 상황은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 진리를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자주 주어지는 길’ 가운데 하나라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스베덴보리 개인의 결혼 이야기나 이성 교제, 결혼을 전제로 한 사귐 등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있으면 좀 알고 싶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생애를 보면,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연애 이야기’나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 같은 서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그런 차원의 관심이나 경험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의 생애 전반이 점점 더 ‘외적 인간의 삶’에서 ‘내적, 영적 사명’으로 옮겨가면서, 일반적인 의미의 이성 교제나 결혼은 사실상 그의 인생에서 중심 주제가 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먼저 비교적 알려진 사실 가운데 하나는, 젊은 시절 스베덴보리가 몇 차례 혼인을 고려할 만한 관계에 가까이 간 적은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당대 유럽의 상류 지식인 사회에 속해 있었고, 광산국 관리이자 과학자, 기술자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교류의 폭도 넓었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고립된 독신자’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충분히 혼인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 속에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실제로 일부 전기에서는 그가 특정 여성과 약혼 직전까지 갔으나 성사되지 않았다는 언급이 나오기도 합니다. 다만 이 부분은 자료마다 차이가 있고, 확정적인 기록이라기보다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수준에 가까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의 인생에서 보다 분명한 전환점은 50대 중반, 곧 영계가 열리고 본격적인 계시와 기록의 삶이 시작된 이후입니다. 이 시기 이후의 스베덴보리는 사실상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매일 같이 영계와 교통하며, 천국과 지옥, 인간의 사후 상태, 말씀의 내적 의미를 기록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고, 이 사명은 단순한 학문적 연구가 아니라 전 존재를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의 연애나 결혼을 유지하거나 새로 시작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도, 또 그의 내적 방향으로 보아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결혼을 단순히 ‘세속적인 것’으로 낮춰 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의 저작 ‘Conjugial Love’(결혼 사랑)를 보면, 그는 진정한 결혼을 매우 높은 차원의 영적 결합으로 이해합니다. 그에 따르면 참된 결혼은 단순한 감정이나 사회적 제도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합’, 곧 인간 내면에서 주님과 연결되는 가장 깊은 형태의 결합을 외적으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결혼을 포기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결혼의 본질을 누구보다 높이 본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실현’하기보다, ‘계시를 통해 인류에게 밝혀야 할 진리’로서 맡은 셈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수많은 ‘천사 부부’들을 실제로 보고, 그들의 삶을 상세히 기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천국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완전한 짝을 이루며, 그 결합이 점점 더 깊어지고, 기쁨과 지혜가 함께 증가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 그는 결혼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단순히 상상으로 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차원에서 더 깊이 관찰하고 체험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이 점에서 보면, 그의 독신은 결혼을 몰라서가 아니라, 더 큰 사명을 위해 한 길로 모아진 삶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결국 정리하자면,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적인 차원에서 이성과의 관계 가능성은 분명 있었으나, 그것이 그의 생애를 규정하는 방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점점 더 ‘내적 인간의 삶’,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과 계시를 기록하는 일에 전 존재를 드리면서, 일반적인 의미의 연애와 결혼의 길에서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사람이 결혼의 가장 깊은 의미와 천국적 형태를 가장 풍성하게 증언한 인물이 되었다는 점이, 그의 생애에서 매우 인상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