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외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이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모든 걸 선이라, 그런 사랑들을 지지하는 모든 것을 진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선들이 악이며, 이러한 진리들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그는 비로소 처음으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며, 또한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는 건 주님 자신, 요한복음에서 가르치십니다. The first state is when the man begins to know that the good and the true are something higher. Men who are altogether external do not even know what good and truth are; for they fancy all things to be good that belong to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nd all things to be true that favor these loves; not being aware that such goods are evils, and such truths falsities.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That men ought to know that the Lord exists he himself teaches in John: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또한 주님이 선 자체, 곧 생명이시며, 진리 자체, 곧 빛이시고, 따라서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면 선도 진리도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Also, that the Lord is good itself, or life, and truth itself, or light, and consequently that there is neither good nor truth except from the Lord, is thus declared: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1, 3-4, 9)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He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John 1:1, 3–4, 9).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 속에서 다시 한번 ‘첫 번째 상태’를 언급하지만, 앞선 AC.7의 첫 상태와는 관점이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첫 상태는 완전한 어둠의 상태가 아니라, ‘빛이 처음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즉, 사람은 아직 선과 진리를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그것들이 자기 자신이나 세상보다 더 높은 차원에 속한 것임을 어렴풋이 알기 시작합니다. 이 ‘알기 시작함’이 바로 빛의 최초 침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적으로 외적이기만 한 사람들의 상태를 매우 분명하게 묘사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그들에게 선이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유익한 것이고, 진리란 그러한 사랑을 정당화해 주는 생각들입니다. 이때의 선과 진리는 외형상으로는 그럴듯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악과 거짓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것을 악과 거짓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무지가 바로 영적 어둠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상황이 달라집니다. 여기서 ‘잉태(conceived anew)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아직 출생이나 성숙이 아니라, 생명이 시작되는 지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합니다. 이는 매우 불편한 깨달음이지만, 동시에 거듭남의 필수 조건입니다. 자기 선에 대한 확신이 무너지지 않는 한, 주님의 선은 들어올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점점 더 빛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빛 안에서 그는 단지 도덕적 기준의 문제를 넘어, ‘주님의 실재’를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선과 진리는 더 이상 추상적 개념이나 윤리적 목표가 아니라, ‘인격적 근원’을 지닌 실재가 됩니다.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나오며, 주님과 분리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8:24)

 

라는 말씀은, 신앙이 단순한 교리 동의가 아니라 ‘주님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인식’임을 보여 줍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른 채 선과 진리를 말하는 것은, 결국 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선언이에요. 요한복음 1장의 인용은 이 인식을 더욱 깊게 확증합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1, 3-4, 9)

 

이 말씀은 거듭남의 첫 인식이 왜 전적으로 주님의 역사인지를 보여 줍니다. 빛은 항상 먼저 비치며, 어둠은 그 빛에 의해 비로소 어둠임이 드러납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첫 상태는 그래서 매우 미세하지만 결정적입니다. 사람은 아직 선을 행하지도,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최소한 ‘자기 자신이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시작합니다. 선과 진리가 자신 위에 있으며, 그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인식의 싹이 트는 것입니다. 이 작은 전환이 이후 모든 거듭남의 과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결국 AC.20은 빛의 첫 인식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적 탐구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이 스스로를 빛으로 계시하시는 사건입니다. 사람은 그 빛 앞에서 자기 선의 한계를 보고, 주님의 선을 향해 눈을 들기 시작합니다. 이때 비로소 거듭남은 방향을 갖게 되며, 어둠 속에서 길을 찾기 시작합니다.  

 

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 심화 1, ‘실제 사례들’

AC.20.심화 1. ‘실제 사례들’ AC.20,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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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 창1:4-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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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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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또는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이 품는다(brood)고 합니다. 그것이 운행하는 대상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시고 보존해 두신 것들인데, 말씀 전체에서 이것들을 가리켜 리메인스(remains), 또는 남은 자(remnant)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 나오는 수면(the faces of the waters)은 바로 이러한 지식들을 말합니다.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AC.19는 창1:2의 마지막 말씀,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의 속뜻을 밝힙니다. 앞선 AC.17-18이 거듭남 이전의 인간을 혼돈과 공허’, ‘흑암’, ‘깊음으로 묘사했다면, 여기서는 그처럼 어두운 상태의 인간에게 이미 주님의 자비가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출발점은 사람이 먼저 자신을 고치거나 주님께 올라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버리지 않고 품으시는 주님의 자비에 있습니다.

 

운행하다(move), 또는 품다(brood)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암탉이 알을 품는 모습에 비유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비유를 지나치게 세분하여 해석하는 것보다, 주님의 자비가 사람 안에 보존해 두신 것들 위에 계속 역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현재 상태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대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그 안에 감추어 보존하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리메인스(remains), 또는 남은 (remnant)입니다. AC.19는 이를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리메인스는 단순히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좋은 추억이나 종교 지식 전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 그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감추어 보존하신다고 말하며, 이것들이 이후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리메인스에서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모아 영적 자산이라는 생각보다 주님께서 안에 보존해 두신 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수면은 무엇일까요? AC.19는 여기의 수면(the faces of the waters)이 바로 이러한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1:2의 문자만 보면 흑암 아래의 물과 그 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들과 그 위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자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다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를 읽으면, 이 구절은 단순한 창조 이전의 풍경이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을 준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는 말씀이 됩니다.

 

그런데 AC.19에는 처음 읽는 독자에게 조금 어려운 말이 하나 더 나옵니다. 이 리메인스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황폐는 앞선 AC.18과 연결됩니다. 사람이 아직 욕정과 그로 인한 거짓에 사로잡혀 있고,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을 선과 진리라고 여기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들이 거듭남의 새로운 생명으로 밝히 드러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약해지고 그것만으로는 참된 선과 진리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들이 새로운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조심할 점도 있습니다. ‘황폐해질 때까지 리메인스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주님께서 그 이전에는 사람 안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구절의 모습은 정반대입니다. 아직 빛이나 이 나타나기 전인데도 하나님의 영은 이미 수면 위를 운행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직 자기 안에서 분명한 영적 빛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주님의 자비는 이미 그 사람 안에 보존된 것들 위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을 리메인스가 밖으로 나오면 오염되기 때문에 주님께서 숨겨 두신다고 너무 단순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AC.19가 직접 말하는 것은 리메인스가 겉의 것들이 황폐해지기 전에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진리를 알아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선을 행하면서도 자기 공로나 명예를 앞세울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왜 사람에게 속한 것이 물러나는 과정과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이 드러나는 과정이 연결되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AC.19의 문장을 설명하기 위한 적용이지, AC.19가 직접 제시한 사례는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AC.18황폐AC.19운행은 서로 연결됩니다. 한쪽에서는 인간 자신의 욕정과 거짓으로 가득했던 상태가 드러나고 그것에 의지할 수 없게 되는 과정이 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주님의 자비가 사람 안에 보존하신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 위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황폐는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시는 장면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리메인스 교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도 중요한 위로를 줍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현재 모습만 보고 사람 안에는 아무런 선도 남아 있지 않다고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다고 해서 그 모든 세월 동안 주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AC.19가 보여 주는 것은 사람이 거듭남을 의식하기 훨씬 전부터 주님께서 그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보존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AC.19의 중심은 리메인스 자체보다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자비입니다. 리메인스가 존재하는 것도 주님께서 보존하셨기 때문이고, 그것들이 훗날 거듭남에 쓰일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1:2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어두우면서도 동시에 희망적입니다. 아직 빛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여전히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흑암 속에서도 주님의 자비는 이미 사람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 보존하신 것들 위에서 운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말씀에서 마침내 빛이 있으라는 새로운 상태가 시작됩니다.

 

심화

1. 자비(mercy) 은혜(grace) 어떻게 다른가?

 

AC.19, 심화 1, ‘자비’(mercy)

AC.19.심화 1. ‘자비’(mercy) AC.19에도 ‘주님의 자비(mercy)’라는 표현이 나오네요.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은 개신교인들을 포함, 보통 ‘자비’보다 ‘은혜’에 익숙합니다. 심지어 ‘자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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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move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본문에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가 나오는데, 여기서 move와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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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리메인스는  겉의 것들이 황폐해질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가?

 

AC.19, 심화 3, 리메인스는 왜 겉의 것들이 ‘황폐해질’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가?

AC.19.심화3. 리메인스는 왜 겉의 것들이 ‘황폐해질’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가? AC.19 해설에는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크게 지배되고 있을 때에는 리메인스가 전면에 드러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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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창1:3,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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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faces of the deep), '황폐'(vastation)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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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을 뜻하며, 사람은 전적으로 이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또한 그것들 속에 완전히 잠겨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그는 빛이 없으므로, 깊음(deep), 곧 어둡고 혼란한 어떤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말씀 여러 곳에서 깊음(deeps), 바다 깊은 곳(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 사람의 거듭남 이전에 그것들은 마르거나(dried up) 황폐해집니다(wasted). 다음 이사야 말씀처럼 말입니다. The “faces of the deep” 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 of which he wholly consists, 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In this state, having no light, he is like a “deep,” 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Such persons are also called “deeps,” and “depths of the sea,” in many parts of the Word, which are “dried up,” or “wasted,” before man is regenerated. As in Isaiah: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러한 사람은 또한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검은 덩어리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는 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를 포함하는데, 이는 거듭남에 앞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참된 것을 알 수 있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기 전에,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Such a man also, when seen from heaven, appears like a black mass, destitute of vitality.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 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 which precedes regeneration; 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 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 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 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 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2절에 나오는 ‘깊음(deep)을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상태로 해석합니다. ‘깊음’은 단순히 깊은 바다나 혼돈의 어떤 상태를 뜻하는 대신, 거듭나지 않은 인간이 전적으로 잠겨 있는 욕정과 거짓의 총체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욕정(cupidities)은 단순한 감정이나 충동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삶의 근원적 지향을 뜻합니다. 이 욕정에서 자연스럽게 거짓(falsities)이 발생하며, 사람은 그것들로 구성된 존재가 됩니다.

 

이 상태의 핵심 특징은 ‘빛이 없음’입니다. 빛이 없다는 것은 진리가 없다는 뜻이고, 진리가 없다는 것은 방향과 분별이 없다는 뜻이며, 그래서 이 상태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람은 생각하고 판단하며 선택하지만, 그 모든 것은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참된 질서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깊음’이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합니다. 깊은 바닷속에서는 위와 아래, 앞과 뒤의 감각이 사라지듯, 이 상태의 인간은 영적 방향감각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말씀에서 ‘깊음’이나 ‘바다의 깊은 곳’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깊음이 거듭남 이전에 ‘마르거나’, ‘황폐해진다’는 점입니다. 이는 거듭남의 과정이 단순히 새로운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제거하고 비우는 과정을 반드시 포함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깊은 물이 그대로 있는 한, 그 위에 새로운 질서는 세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인용은 이 점을 강력한 이미지로 드러냅니다. 주님은 큰 깊음의 물들을 마르게 하시고, 바다의 깊은 곳들을 속량 받은 자들이 건너갈 길로 만드십니다. 이는 욕정과 거짓으로 가득 찬 상태 자체를 제거하시고, 그 자리를 구원의 통로로 바꾸시는 주님의 역사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깊음을 단순히 덮어만 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통과 가능한 길로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본질적인 전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또한 이 상태의 인간은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검은 덩어리’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인간의 외적 활동성, 즉 겉모습,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영적 실재를 보여 줍니다. 세상에서는 매우 활발하고 지적이며, 도덕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도, 영적 생명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천국의 빛 아래에서 아무런 생명도 없는 덩어리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을 낮추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황폐(vastation)라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합니다. 황폐는 파괴가 아니라 준비입니다. 선지자들이 자주 말하는 황폐는, 새로운 생명이 들어오기 위해 기존의 방해 요소들이 제거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사람이 참된 것을 알기 전에, 또 선한 것에 의해 실제로 감동되기 전에, 그 유입을 가로막는 욕정과 거짓들이 먼저 약화되고,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 없이는 어떤 진리도 깊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분명한 결론을 내립니다. 옛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삶의 근원이 더 이상 주도권을 쥐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죽음이 있어야만, 새 생명이 잉태될 공간이 생깁니다. AC.18은 이처럼 거듭남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어두운 관문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그 과정 전체가 주님의 구원 사역 안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심화

1.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

 

AC.18, 심화 1, ‘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

AC.18.심화 1. ‘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 AC.18해설 중 ‘황폐’를 설명하는 데를 보면, ‘욕정과 거짓들이 먼저 약화되고,제거되어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우선 이 ‘약화된다’는 게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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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라틴어 vastatio의 영역 vastationdesolation’(혹은 devastation’)의 비교

 

AC.18, 심화 2, 라틴어 ‘vastatio’의 영역 ‘vastation’과 ‘desolation’(혹은 ‘devastation’)의 비교

AC.18.심화 2. 라틴어 ‘vastatio’의 영역 ‘vastation’과 ‘desolation’(혹은 ‘devastation’)의 비교 AC 포츠역 영어 ‘vastation’은 현대 사전엔 잘 안 나오고, 대신 ‘desolation’이 나오네요. ‘vas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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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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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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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1:2)

 

AC.17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 earth void and empty)라 하며, 또 선과 진리가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은 (the ground)이라고 합니다. 혼돈(void)은 선이 전혀 없는 곳을, 공허(empty)는 진리가 전혀 없는 곳을 뜻합니다. 이로부터 흑암(thick darkness)이 나오는데, 이것은 어리석음을, 그리고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그리고 그 결과 영적, 천적 삶(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십니다. 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 “earth void and empty,” and also the “ground” 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 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 “empty” 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Hence comes “thick darkness,” 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4:22, 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과정 시작 전 인간의 상태를 매우 강한 언어로 묘사합니다. 그는 이 상태의 사람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 earth void and empty)라 하며, 그 안에는 선과 진리가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인간의 겉 사람을 가리키는 상응적 표현입니다. 즉, 거듭남 과정 시작 전의 겉 사람은 외형적으로는 활동적이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경작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지요.

 

혼돈(void)과 ‘공허(empty)의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혼돈’은 선의 부재(不在)를, ‘공허’는 진리의 부재를 뜻한다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이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동의 근원에 참된 선과 진리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도 많은 일을 하고, 판단하며, 선택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자연적 근원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선처럼 보일 수 있어도, 영적으로는 선이 아니며, 외적으로는 진리처럼 보일 수 있어도 실제로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흑암(thick darkness)입니다. 이 어둠은 단순한 정보 부족이나 교육의 결핍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어리석음(stupidity)과 ‘무지(ignorance)라고 부르는데, 특히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에 속한 것들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이 어둠은 영적 무감각의 상태이며, 영적, 천적 삶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 세상일에는 매우 영리할 수 있지만, 영적인 일에는 전혀 눈이 열려 있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의 인용은 이 상태를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라는 말씀은,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자기중심과 세상 중심을 향해 있을 때, 그것은 영적 선을 향해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지혜는 결국 어둠의 일부가 됩니다.

 

이어지는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는 표현은 매우 결정적입니다. 앞서 AC.16에서 예고된 것처럼, ‘하늘’은 속 사람을 가리킵니다. 거듭남 이전의 인간에게도 속 사람은 존재하지만, 그 안에 빛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속 사람은 잠재적으로는 있으나, 아직 주님의 빛으로 열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영적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전제하면서도, 그 가능성이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필요성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인간은 단지 조금 더 나아지거나, 조금 더 선해지기만 하면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혼돈과 공허의 땅에는 새로운 씨가 뿌려져야 하고, 흑암 속에는 빛이 비쳐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오직 주님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빛의 창조가 그토록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묘사가 특정 집단이나 시대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이전의 모든 인간, 즉 아직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적 배경이나 도덕적 성취와 무관하게,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유입되기 전의 인간은 영적으로는 공허하고 비어 있습니다. 이 인식은 인간의 교만을 꺾는 동시에, 주님의 자비를 향한 문을 엽니다.

 

결국 AC.17은 인간을 절망 속에 몰아넣기 위한 설명이 아니라, 정확한 진단입니다. 병이 무엇인지 알아야 치유가 시작되듯, 인간이 자신의 상태가 공허하고 어둡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빛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다음 글에서 설명될 주님의 자비로운 역사가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에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이 나오는데요, 제 경우를 보더라도 저는 심지어 모태신앙임에도 불구, 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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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faces of the deep), '황폐'(vastation)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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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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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러 곳에서 이것은 옛날(the 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 하기도 합니다.  태초는 또한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을 시작하는 첫 시기를 포함하는데, 이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a new creation)라고도 합니다. 선지서 거의 모든 부분에서 창조하다(to create), 짓다(to form), 만들다(to make)라는 표현들은 거듭남을 의미하지만,그 의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를 보면,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 beginning.”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 of old” [antiquitatis] and also the “days of eternity.”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 creation” of man.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러므로 주님은 구속자(the redeemer), 태 속에 만드신 이(the 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the maker)  창조자(the 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시는데, 역시 이사야를 보면,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 heaven)은 거듭나기 전 속 사람(the internal man), (, earth) 겉 사람(the external man)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 1절의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는 표현을 시간적 최초의 순간이 아니라, ‘영적 질서의 출발점’으로 해석합니다. ‘태초’는 태고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하는 첫 시기를 포함합니다. 즉, 창세기의 ‘태초’는 역사 속 한 시점이면서 동시에, 지금도 반복되는 영적 현실입니다.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할 때, 그는 그 사람만의 ‘태초’에 들어가는 셈입니다.

 

선지자들이 이 시기를 ‘옛날(the days of old, [antiquitatis]), 혹은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 한다는 설명은, 이 상태가 단순히 과거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질서’에 속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태고의 상태는 연대기적으로 오래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곧 영원의 질서가 인간 안에 처음 세워지는 상태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상태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태초’, 곧 ‘시작’을 사람의 거듭남의 첫 시기와 직접 연결합니다.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단순히 이전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영적 생명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단순한 변화나 성장으로는 설명될 수 없고, 반드시 ‘새 창조’라는 표현이 필요합니다. 이는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그만큼 거듭남이 전면적인 전환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 맥락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지서에 나오는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 같은 표현들이 거의 언제나 거듭남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표현들은 미묘한 차이를 가지는데, 창조는 생명의 근원 주시는 것을, 지음, 곧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 부여하는 것을, 그리고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걸 가리킵니다. 이 차이는 이후에 더 자세히 다루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원칙 하나가 제시됩니다. 성경에서 창조의 언어는 곧 거듭남의 언어라는 점입니다.

 

이사야의 인용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주님은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를 창조하시고, 지으시며,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곧 주님의 신성과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의 영적 재창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구속자이시며, 태에서부터 지으시는 분이시고, 만드시는 분이시며, 창조자이십니다. 이 모든 호칭은 주님의 다양한 역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이 인간의 거듭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신다는 사실’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말해 주는 표현들입니다.

 

시편의 인용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주님을 찬송한다는 말은, 새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을 인식하고 사랑하게 됨을 뜻합니다. 또한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는 표현은, 거듭남이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며, 그 결과 인간의 외적 삶, 곧 ‘지면’까지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내면의 변화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표면까지 갱신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해석 원리를 예고합니다. ‘(, heaven), 곧 ‘하늘’은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 earth), 곧 ‘’은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가 곧 인간 내면의 구조를 가리킨다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하늘과 땅은 우주의 두 영역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두 차원입니다. 이 해석이 이후 글들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되면서, 창세기 전체가 인간 거듭남의 지도임이 점점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결국 AC.16은 창세기의 ‘시작’을 역사와 인간을 동시에 꿰뚫는 개념으로 제시합니다. 태고의 시대, 거듭남의 첫 시기, 새로운 창조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영적 질서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 표현들입니다. 주님은 그 모든 시작의 주체이시며, 인간의 영적 삶은 언제나 그분 안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심화

1.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본문 중,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의 차이를, 해설에서는 ‘창조는 생명의 근원 주시는 것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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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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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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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해설

AC.14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자신의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키겠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온 천국 전체에서 그분만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AC.15는 바로 그 선언에 이어 매우 중요한 내용을 하나 더 밝힙니다.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도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합니다.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5의 중심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아버지를 천국에서 서로 떨어져 있는 두 분으로 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14에서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AC.14에서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고 했을 때, 전통적인 삼위일체 이해에 익숙한 독자라면 그러면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AC.15에서 스베덴보리는 그 질문에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대답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을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곧바로 덧붙이는 이유가 그것을 막아 줍니다.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아버지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주님과 아버지를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것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설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별도의 철학적 논증을 제시하지 않고 주님 자신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가 선택한 본문은 요14:6, 8-11입니다.

 

빌립은 주님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대답하십니다. 이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안에 계신 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AC.15에서 이 말씀을 인용한 목적은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과 아버지가 하나이시다고 말하는 근거를 주님의 말씀 자체에서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자리에서는 요한복음의 각 표현에 별도의 상응이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왜 이 말씀을 인용했는지를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안에 계신다는 말씀이 AC.15의 주장과 직접 연결됩니다.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주님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대신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아버지는 따로 계시지만 천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본다는 식의 설명도 AC.15의 표현과는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이유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앞의 AC.14와 함께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AC.14에서는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온 천국에서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AC.15에서는 천국 전체가 그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두 단락은 서로 이어져 스베덴보리가 앞으로 주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말할 것인지 그 기초를 놓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더 많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주님의 관계는 정확히 무엇인가?’, ‘성육신 이전과 이후에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주님의 신성과 인성은 어떻게 하나가 되었는가?’, ‘성령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하는 질문들입니다. 이것들은 스베덴보리의 주님 교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AC.15 한 단락이 그 모든 질문에 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곳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범위는 분명합니다.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며, 그 이유는 주님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요14의 주님 말씀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AC.15를 해설하면서 곧바로 주님의 영화 과정 전체나 신적 인성에 관한 모든 교리를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한 내용은 관련 본문이 나타날 때 충분히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천국 전체가 그렇게 안다는 말을 근거로 천사들이 이 사실을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인식하는지까지 추론할 필요도 없습니다. AC.15는 천국의 인식 방식이나 천사들의 지각 구조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단지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AC.14AC.15의 관계가 매우 선명해집니다. AC.14주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AC.15그러면 아버지는?이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단락을 통해 창세기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해설하기 전에 자신이 말하는 주님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해 둡니다. 이것은 앞으로 그의 글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AC.15의 핵심은 결국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그리고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안에 계신 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하여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단락에서는 그 사실을 그대로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과 아버지는 서로 떨어진 두 분이 아니라 하나이십니다. 이것이 AC.15가 직접 밝히는 핵심입니다.

 

 

 

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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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창1, '주님' =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

AC.14 이어지는 모든 글 가운데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 다른 무슨 보조적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으로만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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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이어지는 모든 가운데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분뿐이시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으로만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천국 전체에서 그분만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시는데, 이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자신을 그렇게 부를 것을 명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In the following work, by the name Lord is meant the savior of the world, Jesus Christ, and him only; and he is calledthe Lordwithout the addition of other names. Throughout the universal heaven he it is who is acknowledged and adored as Lord, because he has all sovereign power in the heavens and on earth. He also commanded his disciples so to call him, saying,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3:13)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John 13:13).

 

그리고 부활 후에 제자들은 그분을 주님(the Lord)이라 불렀습니다. And after his resurrection his disciples called himthe Lord.

 

해설

AC.14는 앞에서 이어져 온 거듭남의 상태 설명을 잠시 멈추고,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데 필요한 매우 중요한 명칭 하나를 규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지는 모든 가운데서자신이 주님이라고 할 때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먼저 분명히 밝힙니다.

 

그 대답은 명확합니다.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만입니다. 따라서 이후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별도의 설명 없이 주님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때에는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14는 어떤 특정한 창세기 구절의 속뜻을 해설하는 단락이라기보다 앞으로 사용될 용어를 미리 정해 놓는 성격이 강합니다. 독자가 주님이라는 말을 막연한 신적 존재나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스베덴보리는 처음부터 그 대상을 명시합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이라고 부르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선 중요한 것은 이 표현에 우리가 별도의 상징적 의미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에서 사용할 명칭을 이렇게 정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그 이유를 한층 더 분명하게 합니다. ‘ 천국 전체에서 그분만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시는데, 이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분만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천국에서 여러 주들 가운데 가장 높은 한 분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온 천국 전체에서 그분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마28:18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신 것과도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다만 AC.14에서는 그 교리적 의미를 더 상세히 설명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천국에서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받으시는 근거로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그렇게 부르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요13:13으로 확인합니다.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라고 불렀고, 주님 자신이 그 호칭을 옳다고 인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AC.14의 문맥에서는 이 성경 구절을 그 이상으로 확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앞으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임의적인 명칭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부활 후에 제자들은 그분을 주님이라 불렀다고 덧붙입니다. 이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성경적 용례를 확인하는 문장으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과 뒤의 여러 단락에서는 주님의 신성과 인성, 영화, 아버지와 주님의 하나 되심 등 훨씬 깊은 주제들이 전개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 AC.14 안으로 가져올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바로 다음 AC.15부터 주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이어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은 그 본문이 말할 때 살펴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 점은 이번에 창1을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서 우리가 계속 지키고 있는 원칙과도 잘 맞습니다. 한 단락에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담으려 하기보다, 그 단락이 말하는 만큼 충분히 읽고 다음 단락의 몫은 다음 단락에 남겨 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AC.14 자체의 핵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첫째, 앞으로 주님이라고 할 때에는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킵니다. 둘째, 온 천국 전체에서 그분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십니다. 셋째, 그 이유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넷째, 주님 자신도 제자들이 자신을 라고 부르는 것을 옳다고 하셨으며, 부활 후 제자들도 그분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AC.14는 짧지만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계속 읽어 가는 데 매우 중요한 독법의 기준을 세워 줍니다. 앞으로 스베덴보리가 수없이 주님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명칭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다시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이 자리에서 이미 분명하게 밝혔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 한 분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AC.14가 앞으로 이어질 모든 글을 위해 먼저 밝혀 두는 핵심입니다.

 

심화

1. 주님 예수 그리스도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 심화 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심화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주님’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키겠다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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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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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창1 개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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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번째 상태까지만, 다른 이들은 번째, 번째, 혹은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르지만, 이렇게 여섯 번째 상태까지 이르는 이는 적고(few),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do not all arrive at this state. The greatest part, at this day, attain only the first state; some only the second; others the third, fourth, or fifth; few the sixth; and scarcely anyone the seventh.

 

해설

AC.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1의 여섯 날을 사람의 거듭남에 속한 여섯 개의 연속적인 상태로 제시했습니다. 이어 AC.7부터 AC.12까지 첫 번째 상태에서 여섯 번째 상태까지를 차례로 개괄했습니다. 이제 AC.13에서는 그 설명 끝에 매우 짧지만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상태는 바로 앞 AC.12에서 설명한 여섯 번째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며,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함께 행동하여 형상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나는 모든 사람이 실제로 이 상태까지 이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의 상태를 매우 간결하게 나누어 말합니다. ‘오늘날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며,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째 또는 다섯 번째 상태까지 이릅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문장을 읽을 때 먼저 주의할 것은 AC.7-12에서 설명한 여섯 상태를 모든 사람이 반드시 동일하게 끝까지 통과하는 자동적인 과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상태를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로 제시하면서도, 곧바로 모든 사람이 그 마지막 상태까지 실제로 이르는 것은 아니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앞의 여섯 상태를 일종의 정해진 프로그램처럼 이해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동으로 첫째에서 둘째, 둘째에서 셋째로 올라가 결국 여섯째에 도달한다AC.13은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제로는 각 상태에 이르는 사람의 수가 다르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AC.13을 근거로 각 사람의 현재 영적 단계를 우리가 판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어떤 외적인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이 몇 번째 상태인지 알 수 있다는 판별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단지 거듭나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상태까지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이 번째 상태까지만 이른다는 말을 곧바로 대부분의 신앙인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식으로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첫 번째 상태가 무엇인지는 AC.7에서 이미 설명되었습니다. AC.13에서는 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가장 많다는 사실을 말할 뿐, 그 사람들의 구체적인 심리나 생활 모습을 새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로 갈수록 사람이 줄어드는지도 AC.13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인지, 더 어려운 시험이 있기 때문인지, 사람이 중간에서 물러나기 때문인지 이 단락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를 그럴듯하게 보충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말하지 않은 부분은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적다는 말은 AC.12의 내용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함께 행동하며 형상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상태까지 이르는 사람이 적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뜻밖에도 일곱 번째 상태를 언급합니다. AC.6에서는 여섯 ’, 곧 여섯 개의 연속적인 거듭남 상태를 말했고 AC.7-12에서 그것들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AC.13에서는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덧붙입니다.

 

이 일곱 번째 상태는 바로 앞 AC.12의 마지막 문장과도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으로부터 싸움이 일어나며,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고, 그 후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AC.13 자체는 일곱 번째 상태가 무엇인지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내용은 이어지는 글에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AC.13에서 일곱 번째 상태를 곧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영적 개념과 동일시하여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섯 번째 상태보다 더 나아간 일곱 번째 상태를 언급하며, 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오늘날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인간은 언제나 대부분 번째 상태에 머문다는 보편 명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는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모든 시대 모든 인간에게 아무 조건 없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통계적 법칙처럼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대부분’, ‘어떤 이들’, ‘다른 이들’, ‘적은 이들’, ‘거의 아무도 없음이라는 표현 역시 정확한 수치나 비율을 제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관심을 두는 것은 거듭남의 각 상태에 도달하는 사람의 정확한 통계를 제공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깊이까지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짧은 AC.13이 앞의 개요 전체에 더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AC.6-12만 읽으면 여섯 상태가 하나의 연속적인 질서로 제시되기 때문에 독자는 자연스럽게 모든 거듭나는 사람이 그 순서를 따라 여섯 번째 상태까지 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AC.13은 바로 그 오해를 막아 줍니다.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이 있다는 것과 모든 사람이 실제로 모든 상태에 이른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앞의 상태들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줍니다. 첫째, 둘째, 셋째 등의 숫자는 단순히 신앙생활의 연수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래 신앙생활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높은 상태에 이르는 것도 아니며, AC.13은 그런 시간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 숫자들을 사람의 서열표처럼 사용하는 것도 본문의 목적은 아닙니다. ‘나는 다섯째 상태이고 사람은 둘째 상태다라고 판정할 수 있는 기준을 AC.13이 제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거듭나는 사람들이 실제로 모두 같은 상태까지 이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AC.13의 엄중함을 약화시킬 필요도 없고, 반대로 이것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도구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스베덴보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 문장이 왜 그런 현실을 보여 주는지, 사람은 왜 어떤 상태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지, 각각의 경우에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등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AC.13 한 단락은 그 질문들에 답하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는 관련 본문에서 따로 살펴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AC.13은 오히려 여섯 상태의 개요 끝에 하나의 제한선을 그어 줍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은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이지만,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서 동일하게 완성되는 과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3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거듭나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상태까지 이르는 것은 아니며, 오늘날 대부분은 번째 상태에 이르고, 이후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점차 적어져 여섯 번째 상태에는 적은 이들만, 일곱 번째 상태에는 거의 아무도 이르지 않는다.

 

짧고 다소 엄중한 말이지만, 바로 이 한 문장이 AC.6-12의 개요를 실제 인간의 거듭남에 적용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제한이 됩니다. 거듭남의 상태에는 질서가 있지만, 모든 사람이 실제로 그 질서의 마지막까지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AC.13이 이 자리에서 직접 말하는 핵심입니다.

 

 

 

AC.14, 창1, '주님' =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

AC.14 이어지는 모든 글 가운데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 다른 무슨 보조적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으로만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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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창1 개요, '여섯 번째 상태'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산 영’(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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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0, ‘큰 영광 중에 계신 주와, 찬65, ‘내 영혼아 찬양하라입니다.

 

오늘은 창1 세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6절로 8절, AC 글 번호로는 24번에서 26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1:6-8)

 

이 본문을

 

물과 물 사이의 궁창, 분별이 시작되는 둘째 날

 

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AC.24,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AC.24-25)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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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 창1:6-7,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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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 창1:8,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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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창1 둘째 날, 곧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마칩니다. 이 ‘둘째 날, 두 번째 상태’에 나온 중요한 표현, 개념들은 ‘궁창’, ‘하늘 위의 물’, ‘하늘 아래 물’, ‘속 사람’, ‘겉 사람’, ‘기억 지식’ 및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등이었습니다. 거듭 지금 다룬 내용들이 다음 단계의 기초가 되는 전개이니, 반드시 이전 학습한 내용들을 반복 복습, 보다 탄탄한 배경지식으로 계속 앞으로 쭉쭉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지난 8, 9년째 계속 반복, 또 반복하고 있는 이 창세기 1장을, 그러나 할 때마다 점점 더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내용들과, 그리고 이젠 그런 내용들을 접해도 이해가 되게 하시는 주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오늗도 지난날 배운 것들을 더욱 깊이 알려주시고, 특별히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의 속뜻 통해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의 거듭남을 위해 얼마나 돌보시고, 보살피시며, 끝까지 우리를 책임지시는지를 확인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이 저희에게 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게 도와주세요. 우리가 타인의 연약함에 정신줄 놓치 않도록 끝까지 빛 비춰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3-08(D1)

 

2641, 3. 창1.3, 2026-03-08(D1)-주일예배(창1,6-8, AC.24-26), ‘둘째 날, 두 번째 상태’.pdf
0.50MB

 

 

 

주일예배(2026/03/15, 창1:9-13, AC.27-29), '셋째 날, 세 번째 상태'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1, ‘다 찬양하여라’와, 찬66, ‘다 감사드리세’입니다. 오늘은 창1 네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9절로 13절, AC 글 번호로는 27번에서 29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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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2/22, 창1:3-5), '빛이 있으라', 거듭남의 시작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 소리 있어’와 찬64, ‘기뻐하며 경배하세’입니다. 오늘은 창1 두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20번에서 23번입니다. 본문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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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ing), 그리고 (day)의 의미는 위의 5절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The meaning of “evening,” of “morning,” and of “day,” was shown above at verse 5.

 

해설

AC.26은 단 한 문장입니다. ‘저녁’, ‘아침’, 그리고 의 의미는 앞서 창1:5에서 이미 설명했다고 말하고 곧바로 다음 절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처음 읽으면 별다른 내용이 없는 단순한 참조 문장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글은 창세기 1장을 읽을 때 이미 설명된 상응의 의미를 계속 기억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1:5에서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고 했고, 1:8에서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첫째 날과 둘째 날이라는 시간의 진행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창조의 날들을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연속적인 상태들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저녁’, ‘아침’, ‘도 단순한 하루의 시간대를 넘어 영적인 상태와 그 변화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됩니다.

 

앞서 창1:5에 대한 설명에서 저녁은 선행하는 상태 일반을, ‘아침은 뒤따르는 상태 일반을 나타내며, ‘은 상태 자체를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 둘째 날의 끝에서도 같은 말들이 다시 등장하자 스베덴보리는 그 뜻을 새로 설명하지 않고 앞의 설명을 그대로 참조합니다. 첫째 날에서 사용된 상응의 원리가 둘째 날이라고 해서 갑자기 다른 뜻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점도 있습니다. ‘저녁을 언제나 단순히 악하거나 어두운 상태, ‘아침을 언제나 밝고 완성된 상태라고만 고정해서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저녁아침이 자연계의 시각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거듭남 가운데 서로 이어지는 상태들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상태가 지나가고 그 뒤를 새로운 상태가 이어받으면서 하나의 ’, 곧 하나의 영적 상태가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AC.26에서 이것을 다시 길게 설명하지 않았을까요? 가장 자연스러운 답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위의 5절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라는 한 문장은 독자에게 앞에서 밝혀진 의미를 가지고 계속 읽으라는 안내 역할을 합니다. ‘저녁’, ‘아침’, ‘이 앞으로 반복될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정의할 필요 없이, 앞서 밝혀진 상응을 바탕으로 각각의 날에 해당하는 새로운 내용을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도 작은 독법 하나를 알려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표현의 속뜻을 한 번 설명한 뒤, 뒤에서는 그것을 반복하여 자세히 풀기보다 앞의 설명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짧은 글을 만났을 때 여기에는 내용이 없다고 지나치기보다, ‘앞에서 설명한 어떤 의미를 여기에서도 계속 적용하라는 것인가?를 확인하며 읽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AC.26은 바로 그런 연결점입니다. 첫째 날에서 밝혀진 저녁’, ‘아침’, ‘의 의미가 둘째 날에서도 이어지고 있으며, 창세기의 들이 자연적 시간의 기록만이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상태들을 담고 있다는 앞선 설명을 다시 붙들게 합니다. 짧은 한 문장이지만, 독자가 앞에서 얻은 해석의 열쇠를 놓치지 않고 다음 상태로 넘어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AC.27, 창1:9,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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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 창1:6-7,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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