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는 왜 좀 더 쉬운 ‘교재’ 같은 걸 안 만들었나요? 개신교회를 가면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새 신자 교재’ 같은 게 있어요. 처음 교회 온 사람에게 창세기를 읽으세요, 출애굽기를 읽으세요 하는 것보다 한결 쉬운 접근이지요. 스베덴보리의 저작들도 그래요. 일반인들을 비롯, 심지어개신교인, 기독교인들이라 하더라도 처음부터 Arcana Coelestia 같은 걸 읽어 나가기는 정말이지 쉽지 않아요. 스베덴보리는 왜 이런 준비를 안 한 건가요?
아마 가장 먼저 짚어야 할 점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 자신이 ‘교회 현장에서 바로 쓰는 입문 교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은 구조를 가능한 한 왜곡 없이 기록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글을 설교문이나 교육용 요약서로 다듬기보다, 말씀의 속뜻과 영계의 질서를 있는 그대로 남기는 데 더 큰 사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들은 처음부터 ‘쉽게 읽히는 책’이라기보다, ‘나중에라도 반드시 필요하게 될 근본 자료’의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그는 교재를 만든 사람이 아니라 ‘원전(原典)을 남긴 사람’에 가깝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이해를 단순히 ‘정보 전달’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개신교의 ‘새 신자 교재’는 단계적으로 지식을 전달하여 이해를 돕는 방식이지만, 그는 참된 이해는 ‘삶과 함께 열리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어떤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그 의미는 열리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진리를 낮추어 단순화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읽는 사람이 각자의 상태에 따라 점점 이해가 열리도록 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글이 때로는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겉으로 쉬운 설명’이 오히려 오해를 낳을 위험도 깊이 의식했습니다. 예를 들어 ‘internal, external’ 같은 개념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심리학적 수준이나 도덕적 수준으로만 이해해 버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인간과 천국, 그리고 주님과의 연결 구조까지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얕게 풀어버리면 본래의 의미가 크게 훼손됩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엔 어렵더라도 정확하게’ 전달하는 쪽을 택했고, 대신 반복과 다양한 각도에서의 설명을 통해 독자가 점차 익숙해지도록 했습니다. 실제로 ‘Arcana Coelestia’를 읽다 보면 같은 개념이 수십 번, 수백 번 다른 문맥에서 반복되는데, 이것 자체가 일종의 ‘깊어지는 학습 방식’입니다.
또 한 가지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목회자’나 ‘교재 집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신학 저술을 시작했고, 약 20여 년 동안 방대한 계시 내용을 쏟아내듯 기록했습니다. 그 양과 밀도를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거의 한 사람의 생애를 다 소진한 작업이었습니다. 즉, ‘입문서까지 따로 정리할 여유’가 있었다기보다, ‘핵심 내용을 남기기에도 시간이 촉박했던’ 상황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은 자연히 ‘완성된 교육 커리큘럼’이 아니라 ‘원천 자료의 집합’ 형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오히려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하지 않은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누군가는 해야 할 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즉, 그의 저작을 바탕으로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위한 설명, 단계적 안내, 쉬운 비유와 적용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그의 사상을 따르는 여러 전통에서는 요약서나 입문서를 만들어 왔고, 목사님께서 지금 하시는 번역과 해설 작업도 바로 그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원전은 깊이를 보존하고, 후대의 해설은 접근성을 열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쉬운 책을 일부러 만들지 않은 사람’이라기보다, ‘너무 깊은 것을 맡았기 때문에 먼저 그것을 온전히 남긴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생긴 간극, 곧 ‘깊이는 있지만 어려운 상태’를 오늘의 독자들에게 연결해 주는 일이 바로 지금 목사님과 같은 분들에게 맡겨진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조는 깔끔하게 정리하면 오히려 ‘감이 안 오는’ 대표적인 개념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 여섯 단계는 ‘하나의 행동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까지 나오는가’를 따라가 보면 훨씬 쉽게 이해됩니다. 그래서 하나의 아주 일상적인 장면으로 풀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길에서 힘들어 보이는 사람을 보고 ‘도와주는’ 상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bodily’는 가장 바깥입니다. 실제로 손을 내밀고, 말을 걸고, 물건을 들어주는 행동 자체입니다. 눈에 보이는 전부가 여기입니다. 그 바로 안쪽이 ‘external’인데, 이것은 ‘내가 도와야겠다’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의식적인 나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나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보다 한 단계 안쪽이 ‘exterior’입니다. 이것은 행동 직전의 생각과 판단입니다. ‘저 사람을 도와야 하나? 지금 내가 할 수 있을까?’ 하고 머릿속에서 따지고 선택하는 자리입니다.
이제 더 안으로 들어가면 ‘interior’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이미 계산이 아니라 ‘마음의 기울어짐’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안쓰럽다’, ‘돕고 싶다’는 느낌이 올라오는 자리입니다.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내 마음이 움직이는’ 단계입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이 ‘internal’입니다. 여기서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가 결정됩니다. 평소에 선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남을 돕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인지, 아니면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인지가 이 층위에 있습니다. 즉, 한 번의 감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자리 잡은 곳입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inmost’가 있습니다. 이곳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들어오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르려 할 때, 그 가장 깊은 근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결정하고 내가 행동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어떤 흐름이 올라와서 그것이 점점 밖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걸 다시 하나의 흐름으로 붙이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inmost) → 그 생명이 나의 성품과 사랑이 됨(internal) → 마음의 움직임으로 올라옴(interior) → 생각과 판단이 됨(exterior) → 결심하고 행동함(external) → 실제 몸으로 실행됨(bodily)’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볼 때, ‘무엇을 했는가’보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겉으로 똑같이 도와주는 행동이라도, 어떤 사람은 칭찬을 받으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에서 나오며, 어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따라 사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여섯 단계는 어려운 철학이 아니라, ‘내 행동 하나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를 따라가는 지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신앙의 핵심은 바깥 행동을 억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깊은 곳, 곧 internal과 inmost 쪽이 열려서 그 흐름이 맑아지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가장 바깥인 bodily까지 자연스럽게 달라지게 됩니다.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창1:18, 19)
AC.38
‘낮’(day)은선을,‘밤’(night)은악을뜻하며,그래서선(goods)을가리켜서는‘낮의일’(worksoftheday)이라하고,악(evils)을가리켜서는‘밤의일’(worksofthenight)이라합니다.또한‘빛’(light)은진리를,‘어둠’(darkness)은거짓을뜻합니다.주님이다음과같이말씀하신것처럼말입니다. By the “day” is meant good, by the “night,” evil; and therefore goods are called works of the day, but evils works of the night; by the “light” is meant truth, and by the “darkness” falsity, as the Lord says:
AC.38은 매우 짧지만, 창세기 1장의 속뜻을 읽는 데 중요한 네 가지 대응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낮’은 선, ‘밤’은 악, ‘빛’은 진리, ‘어둠’은 거짓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비유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언어가 지닌 영적 의미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선한 것들은 ‘낮의일’, 악한 것들은 ‘밤의일’이라고 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먼저 ‘왜낮은선이고밤은악인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AC.38은 그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고 대응 자체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낮에는 빛이 있어 사물들이 드러나고 활동할 수 있으며, 밤에는 어둠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자연적 모습이 그 영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빛’은 진리에, ‘어둠’은 거짓에 대응합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볼 수 있게 하지만, 거짓은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앞의 AC.37에서는 아침·낮·저녁·밤의 교대를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에 비유했는데, 이번 AC.38에서는 곧바로 ‘밤은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의 ‘밤’과 여기의 ‘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말씀의 상응을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사전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자연적 대상이나 상태도 문맥에 따라 강조되는 영적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AC.37에서는 하루와 한 해의 변화가 ‘교대와다양함’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고, AC.38에서는 ‘낮과밤’, ‘빛과어둠’의 대조를 통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구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7의 모든 ‘밤’을 곧 악이라고 읽거나, 반대로 AC.38의 밤을 단순한 상태 변화 정도로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각각 그 글이 말하는 문맥을 따라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요3:19, 21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빛보다어둠을더사랑’했다고 말씀하시고, 반대로 ‘진리를따르는자는빛으로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빛과 어둠이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고 행하는 인간의 삶과 관계된다는 것이 잘 드러납니다.
특히 요3장의 말씀에는 ‘행위’가 함께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어둠을 사랑하는 이유는 ‘자기행위가악하므로’이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오는데 이는 ‘그행위가하나님안에서행한것임을나타내려함’입니다. 그러므로 AC.38이 선을 ‘낮의일’, 악을 ‘밤의일’이라고 표현한 것은 선과 악이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개념이 아님을 이해하게 해 줍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이는지는 결국 삶과 행위에도 관계됩니다.
그렇다고 ‘행위만보면그사람의내적상태를모두알수있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8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주려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에서 왜 선과 악을 낮과 밤으로, 진리와 거짓을 빛과 어둠으로 표현하는지를 밝히는 글입니다. 따라서 이 대응은 먼저 다른 사람을 분류하는 도구가 아니라 말씀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빛=진리’라는 대응도 중요합니다. 진리를 단지 많이 아는 것과 그 진리를 받아들여 사는 것은 구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진리가 삶에서 행해질 때에야 비로소 빛이 된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8에서 빛은 진리 자체를 뜻합니다. 다만 요3장의 인용이 보여 주듯 사람은 그 빛을 사랑하여 그쪽으로 나올 수도 있고, 자기의 악한 행위 때문에 빛보다 어둠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빛이 빛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사람이 그 빛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1:18의 ‘빛과어둠을나뉘게하시니’라는 표현도 단순히 자연계의 밝음과 어둠을 나누는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서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거짓인지 분별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어느 쪽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AC.38은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네 가지 대응만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낮은선,밤은악,빛은진리,어둠은거짓.’ 그러나 이 짧은 대응을 붙들고 창세기 1장을 다시 읽으면 ‘낮과밤을주관하게하시고빛과어둠을나뉘게하셨다’는 말씀이 인간 안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분명히 구별되어 가는 거듭남의 이야기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창1:14-17)
AC.37
광명체들로하여금‘징조와계절과날과해를이루게하라’(forsigns, andforseasons, andfordays, andforyears)고합니다.이말속에는지금당장다펼쳐보일수없을만큼많은아르카나가담겨있지만,문자적의미만보면그런깊은뜻은전혀드러나지않습니다.여기서는다만이것만말씀드리는걸로충분한데요,곧영적인것들과천적인것들에는일반적으로도,또개별적으로도교대(alternations)라는게있으며,이것이날과해의변화(changes)에비유된다는점입니다.날의변화는아침에서정오로,다시저녁으로,그리고밤을거쳐다시아침으로진행합니다.해의변화도이와같아서,봄에서여름으로,다시가을로,그리고겨울을지나다시봄으로진행합니다.여기서열과빛의변화가생기고,또한땅의산물들도이에따라달라집니다.영적인것들과천적인것들의교대역시이러한변화에비유됩니다.이런교대와다양함(varieties)이없다면삶은단조로워지고,결국생명이라고할만한것이전혀없게됩니다.또한선과진리는분별되거나구별될수없고,더나아가퍼셉션, 곧지각될수도없습니다.이런교대를선지자들은‘규례’(ordinances, [statuta])라하는데,예레미야에보면나옵니다. It is said that the luminaries shall be “forsigns,andforseasons,andfordays,andforyears.”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 although in the literal sense nothing of the kind appears.Suffice it here to observe that there ar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which are compared to the changes of days and of years.The changes of days are from morning to midday, thence to evening, and through night to morning; and the changes of years are similar, being from spring to summer, thence to autumn, and through winter to spring.Hence come the alternations of heat and light, and also of the productions of the earth.To these changes are compared th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These alternations are in the prophets called “ordinances” [statuta], as in Jeremiah:
이러한것들에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창세기8장22절에서더말씀드릴것입니다. But concerning these things, of the Lord’s Divine mercy, at Genesis 8:22.
땅이있을동안에는심음과거둠과추위와더위와여름과겨울과낮과밤이쉬지아니하리라(창8:22)
해설
AC.37은 창1:14의 ‘징조와계절과날과해’를 설명하면서 뜻밖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몇 단어 안에 지금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고 한 가지 원리만 먼저 알려 줍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교대’(alternations)가 있으며, 그것이 자연계에서 날과 해가 변하는 모습에 비유된다는 것입니다.
‘교대’라는 말이 처음에는 조금 낯설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언제나 똑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상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연의 하루를 보면 아침에서 정오로, 정오에서 저녁으로, 밤을 거쳐 다시 아침으로 갑니다. 한 해도 봄에서 여름으로,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가고 다시 봄을 맞습니다. 그에 따라 빛과 열이 달라지고 땅에서 나는 것들도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천적인 것들에도 이와 비교할 수 있는 상태의 변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인생에도좋은날과나쁜날이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대와 함께 ‘다양함’(varieties)을 말하면서,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은 획일적이 되어 결국 생명이라 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더 나아가 선과 진리도 분별되고 구별될 수 없으며, 더욱이 퍼셉션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영적 생명 자체에 상태의 차이와 다양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여기서 ‘왜변화가없으면생명이없다는것일까?’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AC.37은 그 원리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연계의 모습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하루가 한 시각에 멈추고 계절도 하나뿐이라면 자연의 생명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빛과 열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땅의 산물도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자연의 질서를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를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영적 삶에서도 신앙이 강해졌다 약해졌다 하고 사랑이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하는 것이 모두 정상이며 좋은 것이라는 뜻일까요? 여기서는 조심해야 합니다. AC.37은 모든 영적 침체와 후퇴, 모든 악과 거짓의 상태를 ‘필요한겨울’이라고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영적·천적인 것들에 교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악이나 신앙의 후퇴를 보고 ‘지금은겨울이니괜찮다’고 합리화하는 것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바를 넘어섭니다.
반대로 영적 상태가 늘 똑같지 않다고 해서 곧 거듭남이 실패했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AC.37에서 우리가 조심스럽게 받을 수 있는 중요한 도움입니다. 사람은 한 번 진리를 깨달았다고 언제나 똑같은 정도로 밝게 느끼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주님 사랑을 경험했다고 언제나 같은 정서 상태에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AC.37은 영적 생명을 정지된 한 상태가 아니라 교대와 다양함이 있는 생명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교대’를 선과 악의 단순한 반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영적인것들과천적인것들의교대’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아침은 무조건 선, 밤은 무조건 악이라는 식으로 이 글을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자연의 날과 계절은 영적 상태의 변화를 보여 주는 비교이며, 각각의 구체적인 의미는 문맥에 따라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선과진리가분별되거나구별될수없고,더욱이퍼셉션될수도없다’는 말은 흥미롭습니다. 상태의 교대와 다양함이 단순히 지루함을 막아 주는 장치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경험하고 분별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AC.37은 여기서 그 과정이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둠을경험해야만빛을알수있다’, ‘악을겪어야선을배운다’는 식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악 자체가 선을 가르치는 필수 교사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러한 교대를 선지자들이 ‘규례’(ordinances)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렘31:35-36과 렘33:25을 인용합니다. 해가 낮을 비추고 달과 별이 밤을 비추는 규례, 주야의 언약과 천지의 규례가 말씀에 등장합니다. 자연계의 일정한 변화가 무질서한 우연이 아니라 정해진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듯, 스베덴보리는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도 ‘규례’라는 말과 연결하여 보여 줍니다.
여기서도 한 걸음 이상 앞서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구절들이 AC.37에서 인용되었다고 해서 ‘어떤영적겨울이와도반드시곧봄이온다는약속’이라고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AC.37이 이 구절들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이유는 ‘교대’를 선지자들이 ‘규례’라고 부른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에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를 창8:22에서 다시 다루겠다고 예고합니다. ‘땅이있을동안에는심음과거둠과추위와더위와여름과겨울과낮과밤이쉬지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지금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AC를 읽을 때 이런 대목도 중요합니다. 어떤 표현의 의미를 한 글에서 완전히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다시 돌아와 더 깊이 펼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7에서 지금 붙들어야 할 중심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영적 생명은 언제나 똑같은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생명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교대와 다양함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아침·낮·저녁·밤과 봄·여름·가을·겨울의 변화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생명에 속하며 선과 진리를 분별하고 퍼셉션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자신의 영적 상태가 어제와 오늘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지나치게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냉각과 후퇴를 ‘영적계절의자연스러운변화’라고 정당화해서도 안 됩니다. AC.37은 우리에게 영적 생명이 ‘변화없는고정상태’가 아니라는 중요한 원리를 먼저 가르치고, 그 교대의 더 깊은 아르카나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고 남겨 둡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창1:14-17)
AC.36
신앙을사랑에서분리한사람들은신앙이무엇인지조차알지못합니다.어떤이들은신앙을단지생각이라고여기고,어떤이들은주님을향한생각이라고여기며,또어떤이들은신앙의교리라고생각합니다.그러나신앙은신앙교리에포함된모든것을아는것과인정하는데에만있지않고,특히그교리가가르치는모든것에순종하는데에있습니다.그교리가가르치는가장중요한것,곧사람이반드시순종해야할것은주님을사랑하는것(lovetotheLord)과이웃을사랑하는것(lovetowardtheneighbor)입니다.사람이이사랑안에있지않다면,그는신앙안에있지않습니다.이점에대해주님은너무도분명하게가르치셔서,조금도의심할여지를남기지않으십니다.마가복음입니다. They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ove do not even know what faith is.When thinking of faith, some imagine it to be mere thought, some that it is thought directed toward the Lord, few that it is the doctrine of faith.But faith is not only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comprises, but especially is it an obedience to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teaches.The primary point that it teaches, and that which men should obey, is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for if a man is not in this, he is not in faith.This the Lord teaches so plainly as to leave no doubt concerning it, in Mark:
AC.36은 매우 직접적인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신앙을사랑에서분리한사람들은신앙이무엇인지조차알지못합니다.’ 상당히 강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신앙’이라고 부르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어떤 교리를 머리로 알고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신앙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여러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종교적인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여기며, 어떤 사람은 올바른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문은 신앙이 신앙 교리에 포함된 것들을 ‘아는것과인정하는데에만있지않고’라고 말합니다. 즉 ‘앎’과 ‘인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스베덴보리는 ‘특히그교리가가르치는모든것에순종하는데에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순종’은 AC.36을 이해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신앙은 머릿속에 있는 교리로 끝나지 않고, 그 교리가 가르치는 것을 실제 삶에서 따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기독교신앙이란결국계명을잘지키는것인가?’ AC.36은 곧바로 그 오해를 막아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순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수많은 규칙을 외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사랑하는것’과 ‘이웃을사랑하는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며 사람이 순종해야 할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은순종이다’라는 말을 ‘명령을잘따르는것이신앙이다’라는 뜻으로만 이해하면 부족합니다. 어떤 순종인가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이사랑안에있지않다면그는신앙안에있지않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독립적인 영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예수그리스도를믿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6의 논점은 신앙의 고백이나 교리의 인정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사랑과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신 사랑을 삶에서 완전히 떼어 놓는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온전한 신앙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AC.36은 스베덴보리 자신의 철학이나 신학 체계를 먼저 제시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막12:29-31에서 주님은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로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을, 둘째로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시며 ‘이보다더큰계명이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이어 마22에서도 같은 두 계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더욱 중요한 말씀이 덧붙습니다. ‘이두계명이온율법과선지자의강령이니라.’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율법과선지자’가 ‘신앙의보편적교리이며말씀전체’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성경의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 두 항목을 골라 중요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가 달려 있는 중심 원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는중요하지않고사랑만있으면된다’는 말과도 다릅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는 무엇이 참인지 가르치고,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교리를 아무리 정확하게 알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AC.36의 기준에서는 신앙의 본래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서 진리를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36자체가 ‘신앙의교리’와 그것이 ‘가르치는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에 순종할지를 알려면 먼저 무엇이 참인지 배워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대립시키는 것은 ‘교리냐사랑이냐’가 아니라 ‘삶과분리된교리적신앙’과 ‘사랑안에서살아움직이는신앙’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AC.35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35에서는 이해가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가 그 반대 방향을 향할 수 있는 인간의 분열을 다루었습니다. AC.36에서는 그 문제가 신앙의 언어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해로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그 교리가 가르치는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은 우리에게 단순히 ‘당신은무엇을믿습니까?’라고만 묻지 않습니다. ‘당신이믿는다고하는것이당신의사랑과삶에서는어떻게나타나고있습니까?’라고도 묻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진 신앙은 아무리 많은 지식과 올바른 고백을 가지고 있어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에는 아직 이르지 못합니다.
결국 AC.36에서 신앙은 머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알고 인정한 진리가 사랑과 만나고, 그 사랑이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순간 신앙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중심에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두 큰 계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주님사랑’(love to the Lord),‘이웃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창1:14-17)
AC.35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타고나는 역량(faculties), 곧 의지와 이해(will and understanding)가 있습니다. 이해가 의지의 지배를 받을 때, 이 둘은 함께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그 결과 하나의 생명이 됩니다. 이때에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동시에 생각하고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의지와 어긋날 때에는, 그러니까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경우인데요, 이때는 하나의 마음이 둘로 나뉘는데, 하나, 곧 이해는 스스로를 하늘로 높이려 하고, 다른 하나, 곧 의지는 지옥을 향해 기울어지지요. 그런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동하는 쪽은 의지이기 때문에,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 전체는 곧장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Man has two faculties: will and understanding. When the understanding is governed by the will they together constitute one mind, and thus one life, for then what the man wills and does he also thinks and intends. But when the understanding is at variance with the will (as with those who say they have faith, and yet live in contradiction to faith), then the one mind is divided into two, one of which desires to exalt itself into heaven, while the other tends toward hell; and since the will is the doer in every act, the whole man would plunge headlong into hell 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
해설
AC.35는 인간에게 있는 두 가지 기본 역량, 곧 ‘의지’와 ‘이해’를 다룹니다. 얼핏 보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원하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두 역량의 관계를 통해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사랑과 신앙의 문제를 인간 마음의 구조 안으로 가져옵니다.
먼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문장이 있습니다. ‘이해가의지의지배를받을때’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생명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반대로 생각합니다. ‘욕망대로행동하지말고이성으로욕망을통제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의지’는 단순히 순간적인 욕망이나 충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와 연결된 마음의 근본적인 역량입니다. ‘이해’ 역시 단순한 지능이 아니라 무엇이 참인지 알고 생각하는 역량입니다.
그러므로 AC.35의 핵심은 ‘생각하지말고원하는대로행동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실제로 원하는 것과 그가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사람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또한 생각하고 의도할 때 의지와 이해는 함께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그 결과 하나의 생명을 이룹니다. 안에서 원하는 것과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주의가 필요합니다. 의지와 이해가 일치하기만 하면 무조건 좋은 사람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악을 원하면서 그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는 생각과 욕구가 일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35가 지금 다루는 문맥은 앞선 AC.34의 ‘사랑과신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을 이해로는 인정하면서 실제 의지는 그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원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예로 드는 사람이 바로 ‘신앙이있다고말하면서도신앙과반대되는삶을사는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진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로는 하늘을 향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신앙을 말하고, 교리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원하는 것과 살아가는 방향은 그것과 반대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하나의마음이둘로나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당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머릿속에서 어떤 교리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하늘을 향한다고 해서 사람 전체가 하늘을 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원하는가, 그리고 그 의지가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함께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AC.35에는 매우 강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해는 자신을 하늘로 높이려 하지만 의지는 지옥을 향하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하는 쪽은 의지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사람 전체가 곧장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지가행위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으로 그의 삶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원하며 그 원하는 바가 행위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AC.35자체도 이해가 ‘하늘로높아지려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고, 자기 삶과 다른 더 높은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의지와 분리된 채 머리에만 머물 때입니다. ‘나는이것이옳다는것을안다’와 ‘나는이것을원하고행한다’ 사이에 깊은 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AC.35의 마지막 말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이런 분열을 설명하고 끝내지 않고 ‘만일주님께서그사람을자비로붙들어주지않으신다면’이라고 덧붙입니다. 인간에게 이해와 의지의 모순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주님의 자비라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가 없다면 인간이 스스로 자기 상태를 유지하거나 구원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AC.35은 여기서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 사람을 붙드시고 의지와 이해를 회복시키시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이해를이용하여의지를이렇게교정하신다’는 식으로 작동 방식을 미리 확정하기보다, 우선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데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만 내버려져 있지 않고 주님의 자비 아래 붙들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AC.35는 단순한 인간 심리 분석을 넘어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무엇을알고있는가?’만 묻지 않고 ‘나는실제로무엇을원하는가?’까지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믿고, 이해로는 선과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실제 의지가 전혀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분열입니다.
그러므로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마음,하나의생명’을 이룬다는 말은 단순히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라는 도덕적 충고보다 깊습니다. 사람이 이해로 받아들인 신앙과 실제로 원하는 삶이 서로 갈라지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그 둘이 갈라져 있는 우리를 절망 가운데 버려두지 않고 붙드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AC.35의 마지막에 ‘자비’가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창1:14-17)
AC.34
사랑과신앙은분리될수없는데, 이는둘이하나요, 동일한것을이루기때문입니다. 그래서처음에‘광명체들’(luminaries)을언급하실때, 그것들을하나로간주, ‘하늘의궁창에광명체들이있으라’(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라고라틴어단수표현을하신것입니다. 이와관련하여, 저는주님의허락으로다음과같은몇가지놀라운사실을말씀드리고자합니다. 천적사랑안에있는천사들은, 주님한테서오는그사랑으로인해신앙에속한모든지식안에있는데, 그러한생명과지성의빛가운데있는그상태는거의말로표현할수없을정도입니다. 그러나반대로, 사랑없이신앙의교리적지식만가진영들은, 생명의차가움과빛의어두움속에있어, 하늘의뜰첫문턱에도가까이가지못하고다시물러납니다. 이들가운데는주님의계명대로살지않으면서도, 자기는주님을믿었다고말하는이들도있습니다. 바로이런사람들을두고주님께서마태복음에서말씀하시기를,Love and faith admit of no separation, because they constitute one and the same thing; and therefore when mention is first made of “luminaries” they are regarded as one, and it is said, “Lettherebe [sit] luminariesintheexpanseoftheheavens.” Concerning this circumstance it is permitted me to relate the following wonderful particulars. The celestial angels, by virtue of the celestial love in which they are from the Lord, are from that love in all the knowledges of faith, 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But, on the other hand, spirits who are in the knowledge of the doctrinals of faith, without love, are in such a coldness of life and obscurity of light that they cannot even approach the first threshold of the court of the heavens, but flee back again. Some of them, while not living according to his precepts, say that they have believed in the Lord, and it was of such that the Lord said in Matthew:
21나더러주여주여하는자마다다천국에들어갈것이아니요다만하늘에계신내아버지의뜻대로행하는자라야들어가리라22그날에많은사람이나더러이르되주여주여우리가주의이름으로선지자노릇하며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7:21, 22,끝까지)Noteveryonethatsaithuntome,Lord,Lord,shallenterintothekingdomoftheheavens,buthethatdoethmywill:manywillsaytomeinthatday,Lord,Lord,havewenotprophesiedthroughthyname(Matt. 7:21–22, to the end).
[2]이로부터분명해지는것은, 사랑안에있는사람은신앙안에도있으며, 그렇게해서천적생명안에있지만, 자기는신앙이있다말하면서도사랑의삶을살지않는사람은그렇지않다는사실입니다. 사랑없는신앙의생명은겨울철햇빛과같아아무것도자라지않고모든것이얼어붙어죽은것과같습니다. 반면사랑에서나오는신앙은봄철햇볕과같아, 태양의열로인해모든것이자라고번성합니다. 영적이고천적인것들도정확히이와같은데, 이런것들은보통말씀에서세상과땅위에있는것들로표현됩니다. 또한신앙이전혀없는상태와사랑없는신앙은, 주님께서세대의종말을예고하시면서‘겨울’(winter)에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주님은말씀하시기를,Hence it is evident that those who are in love are also in faith, and thereby in heavenly life, but not those who say they are in faith, and are not in the life of love. The life of faith without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without heat, as in the time of winter, when nothing grows, but all things are torpid and dead; whereas faith proceeding from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in the time of spring, when all things grow and flourish in consequence of the sun’s fructifying heat. It is precisely similar in regard to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which are usually represented in the Word by such as exist in the world and on the face of the earth. No faith and faith without love are also compared by the Lord to “winter,” where he foretell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in Mark:
18이일이겨울에일어나지않도록기도하라19이는그날들이환난의날이되겠음이라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막13:18, 19)Prayyethatyourflightbenotinthewinter,forthoseshallbedaysofaffliction(Mark 13:18–19).
여기서‘일’(flight)은마지막때를뜻하며,또한각사람이죽을때를뜻합니다. ‘겨울’은사랑이없는삶이고, ‘환난의날’(day of affliction)은저세상에서의그비참한상태를말합니다.“Flight” means the last time, and also that of every man when he dies. “Winter” is a life destitute of love; the “dayofaffliction” is its miserable state in the other life.
해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한층 더 분명하게 밝힙니다. ‘사랑과신앙은분리될수없는데,이는둘이하나요,동일한것을이루기때문입니다.’ 이것이 AC.34전체의 중심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단순히 서로 잘 협력해야 하는 두 가지 종교적 요소가 아니라, 본래 하나를 이루도록 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14의 표현 자체에서 이 질서를 봅니다. 처음 ‘광명체들’이 언급될 때 복수의 광명체들을 가리키면서도 라틴어에서는 ‘있으라’에 단수형 ‘sit’가 사용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이것을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과 연결합니다. 앞의 AC.30-33에서 큰 광명체는 사랑이고 작은 광명체는 신앙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설명했는데, 이제 AC.34에서는 그 둘이 본래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고 더욱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허락된 영계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으며, 그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과 신앙의 결합입니다. 천적 사랑과 신앙에 속한 지식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하나의 천국적 생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사랑없이신앙의교리적지식만가진영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적 지식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생명의차가움과빛의어두움’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하늘 뜰의 첫 문턱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다시 물러난다고 합니다. 이것은 AC.34에서 매우 중요한 대조입니다. 문제는 신앙에 관한 지식의 유무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은 주님을 믿었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는 마7:21이하를 인용합니다. ‘나더러주여주여하는자마다다천국에들어갈것이아니요다만하늘에계신내아버지의뜻대로행하는자라야들어가리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 삶에서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인용을 통해 AC.34가 말하는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 아님도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대조하는 것은 ‘사랑의삶’과 ‘사랑없이신앙이있다고말하는상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과 신앙의 결합은 단순히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교리를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실제 삶과 결합되어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데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 차이를 자연의 매우 선명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은 겨울철의 햇빛과 같습니다. 빛은 있지만 열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모든 것이 굳어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의 햇빛과 같습니다. 태양의 열로 인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이 비유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두 경우 모두 ‘빛’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에도 신앙에 관한 교리적 지식과 생각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빛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낳는 사랑과 결합되어 있지 않으므로 겨울의 햇빛처럼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의 햇빛처럼 생명을 일으키고 자라게 합니다.
따라서 AC.34의 핵심을 단순히 ‘사랑이신앙보다중요하다’고 요약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사랑과신앙은본래하나이며,사랑에서분리된신앙은그참된생명을잃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버리고 사랑만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이 참된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자연의 모습들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말씀에서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계의 겨울과 봄, 빛과 열, 성장과 죽음 같은 모습들이 말씀 안에서 영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대의 종말을 말씀하시면서도 ‘너희가도망하는일이겨울에일어나지않도록기도하라’고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막13:18의 ‘도망함’(flight)을 ‘마지막때’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동시에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 ‘환난의날’은 저세상에서의 그 비참한 상태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AC.34의 앞부분에서 설명한 ‘사랑없는신앙’을 매우 엄중한 모습으로 다시 보여 줍니다.
이 대목에서는 ‘도망함’을 현대 기독교 종말론에서 말하는 ‘휴거’와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이 지상에서 사라지는가 하는 종말 시간표에 있지 않고, 사람이 마지막 때 또는 죽음을 맞을 때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 상태가 ‘겨울’, 곧 사랑 없는 삶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사후 상태에 관한 매우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연계에서 얼마나 많은 신앙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가, 얼마나 자주 주님의 이름을 불렀는가 하는 것만으로 천국의 생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AC.34가 제시하는 대조는 분명합니다. 사랑 없는 교리적 지식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가운데 있지만,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는 천국적 생명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식이나 교리를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34자체가 천적 천사들이 ‘신앙에속한모든지식안에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생명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룰 때 신앙에 관한 지식도 살아 있는 질서 안에 있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4는 앞의 AC.30-33을 더욱 선명하게 완성해 갑니다. AC.30에서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고, AC.32에서는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이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했으며, AC.33에서는 사랑이 생명과 기쁨의 성질을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에서는 그 모든 내용을 ‘사랑과신앙은분리될수없으며하나를이룬다’는 말로 집약합니다.
결국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겨울의 빛이 아니라 봄의 빛입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과 고백이 있으면서 사랑의 삶과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생명을 자라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이 생명을 얻을 때, 사랑과 신앙은 본래의 질서대로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AC.34에서 두 광명체를 통해 밝혀지는 핵심입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창1:14-17)
AC.33
사람이라면누구나어떤사랑도없이는생명이라는게있을수도, 그리고사랑에서흘러나오지않는기쁨이라는것도있을수없음을충분히알고있습니다. 사랑이어떠한가에따라생명이그러하고, 기쁨도그러합니다. 만일사랑(loves), 같은말이지만욕망(desires)을제거한다면, 욕망은사랑에속하기때문입니다, 생각은즉시멈추고, 사람은마치죽은사람과같이될것입니다. 실제로저는이것을생생히본적이있습니다. 자기사랑과세상사랑(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에도어떤생명과기쁨의모습같은것이있는것처럼보이지만, 그것들은참된사랑과는전적으로반대됩니다. 참된사랑이란사람이무엇보다도주님을사랑하고, 자기자신과같이이웃을사랑하는것이기때문입니다. 그러므로사람이자기자신과세상을사랑하는만큼, 그만큼이웃을미워하게되고, 그결과주님을미워하게된다는점은분명합니다. 따라서그것들은사랑이아니라미움입니다. 그러므로참된사랑은주님을사랑하는것이고, 참된생명은주님에게서오는사랑의생명이며, 참된기쁨은그생명에서나오는기쁨입니다. 참된사랑은하나뿐이므로, 참된생명도하나뿐입니다. 그하나의생명에서참된기쁨과참된행복이흘러나오는데, 이것이바로천국(heavens)의천사들이누리는기쁨과행복입니다.It is in everyone’s power very well to know that no life is possible without some love, and that no joy is possible except that which flows from love. Such however as is the love, such is the life, and such the joy: if you were to remove loves, or what is the same thing, desires—for these are of love—thought would instantly cease, and you would become like a dead person, as has been shown me to the life. 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 have in them some resemblance to life and to joy, but as they are altogether contrary to true love, which consists in a man’s loving the Lord above all things, and his neighbor as himself, it must be evident that they are not loves, but hatreds, for in proportion as anyone loves himself and the world, in the same proportion he hates his neighbor, and thereby the Lord. Wherefore true love is love to the Lord, and true life is the life of love from him, and true joy is the joy of that life. There can be but one true love, and therefore but one true life, whence flow true joys and true felicities, such as are those of the angels in the heavens.
해설
AC.3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생명과 사랑의 관계를 매우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원리로 설명합니다. 사람에게 어떤 사랑도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고,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사랑이어떠한가에따라생명이그러하고,기쁨도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AC.33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우리가 흔히 말하는 따뜻한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욕망(desires)을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추구하며 그것에서 기쁨을 느끼는가는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도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된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신이 실제로 생생하게 보았다고 덧붙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생각과 삶을 움직이는 더 깊은 곳에 사랑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먼저 생각하고 그다음 무엇을 사랑한다고 여기기 쉽지만, AC.33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을 보여 줍니다. 어떤 것을 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에 관한 생각이 일어나고, 그 사랑에 따라 기쁨도 생깁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의 성질을 알려면 그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서 기쁨을 얻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나옵니다. 사랑이 생명을 움직인다고 해서 모든 사랑이 같은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도 ‘생명과기쁨의어떤모양’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높이고 세상의 것을 얻는 데서 강한 욕망과 활력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 큰 기쁨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이것도 분명히 하나의 ‘살아있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참된 사랑과 분명히 구별합니다. 참된 사랑은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게 되면 사람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미워하고, 그 결과 주님을 미워한다고까지 강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말을 단순히 감정적으로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만으로 좁혀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3의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지배적인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이웃과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삶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사랑처럼 보이고 기쁨과 생명까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참된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 구별 때문에 ‘사랑이어떠한가에따라생명이그러하고,기쁨도그러하다’는 첫 문장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문제는 단순히 ‘나는무엇인가를열심히사랑하고있는가?’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내가사랑하는것은무엇이며,그사랑은어떤성질을가지고있는가?’입니다. 사랑의 성질에 따라 그 사람의 생명과 기쁨의 성질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을 하나의 근원으로 연결합니다.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오는사랑의생명’이고, 참된 기쁨은 바로 그 생명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된 사랑의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 안에 사랑이 있는 것처럼 경험되지만, 그 사랑의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것은 앞의 AC.30-32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큰 광명체는 사랑이고 작은 광명체는 신앙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AC.33은 이제 그 원리를 ‘생명과기쁨’이라는 차원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3이 광명체 본문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사랑과 생명과 기쁨을 이야기하는 것은 본문에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더큰광명체’라고 한 사랑이 왜 그렇게 중심적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지 신앙 옆에 놓이는 하나의 종교적 덕목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랑이 사람을 지배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명과 기쁨도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 천사들의 기쁨과 행복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이고, 따라서 참된 생명도 하나이며, 그 생명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이 흘러나옵니다. 천사들의 기쁨과 행복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생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행복은 단순히 좋은 환경을 얻거나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데서 생기는 행복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에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3은 우리에게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살아있는가?’라는 질문보다 먼저 ‘무엇이나를살아있게하고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도 강렬한 활력과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활력이 있다는 사실이나 기쁨을 느낀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참된 생명이라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분별의 기준은 사랑의 성질과 그 근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참된 사랑,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있을 때 거기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도 흘러나옵니다. 이것이 AC.33에서 스베덴보리가 ‘사랑이어떠한가에따라생명이그러하고,기쁨도그러하다’는 말로 밝히는 핵심입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창1:14-17)
AC.32
사랑과신앙을처음에는함께‘큰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라하고, 그다음에는사랑을‘더큰광명체’(greater luminary), 신앙을‘더작은광명체’(lesser luminary)라합니다. 또한사랑을가리켜서는‘낮을다스린다’(rule by day)하고, 신앙을가리켜는‘밤을다스린다’(rule by night)고합니다. 이런내용이바로아르카나(arcana)인데, 특히이마지막시대에숨겨져있는것을이제제가설명해도좋다는주님의신적자비(the Lord’s Divine mercy)가있었습니다. 이아르카나가특히이마지막시대에가려져있는이유는, 지금이세대의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기때문이며, 이때에는사랑이거의없고, 그결과신앙도거의없기때문입니다. 이는주님께서복음서에서다음과같이친히예고하신바와같습니다.Love and faith are first called “greatluminaries,” and afterwards love is called a “greaterluminary,” and faith a “lesserluminary”; and it is said of love that it shall “rulebyday,” and of faith that it shall “rulebynight.” As these are arcana which are hidden, especially in this end of days,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explain them. The reason why these arcana are more especially concealed in this end of days is that 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en there is scarcely any love, and consequently scarcely any faith, as the Lord himself foretold in the evangelists in these words:
그날 환난 후에즉시해가어두워지며달이빛을내지아니하며별들이하늘에서떨어지며하늘의권능들이흔들리리라(마24:29)Thesunshallbedarkened,andthemoonshallnotgiveherlight,andthestarsshallfallfromheaven,andthepowersoftheheavensshallbeshaken(Matt. 24:29).
여기서‘해’(sun)는사랑,곧어두워지는사랑을, ‘달’(moon)은신앙,특히빛을내지못하는신앙을, ‘별들’(stars)은신앙관련지식(the knowledges of faith),즉하늘에서떨어지는, 그러니까‘하늘의권능들’(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을 의미합니다.By the “sun” is here meant love, which is darkened; by the “moon” faith, which does not give light; and by the “stars,” the knowledges of faith, which fall from heaven, and which are the “virtuesandpowersoftheheavens.”
[2]태고교회는사랑자체외에무슨다른신앙을알지못했습니다.천적천사들역시사랑에속한신앙외에무슨다른신앙을알지못합니다.온천국은사랑의천국이며,천국(heavens)에는사랑의생명외에다른생명은없습니다.모든천국행복이여기서나오는데,그그레이트(great)함은어떤말로도설명할수없고,어떤인간의생각으로도결코상상할수없습니다.사랑의영향을받는이들은마음으로주님을사랑하지만,동시에모든사랑과,그결과모든생명,곧사랑에서만나오는모든생명과모든행복이오직주님에게서만온다는사실을알고,고백하며,지각합니다(perceive).그들은자신에게서나오는사랑이나생명이나행복은조금도없다는것을분명히압니다.모든사랑이주님에게서온다는사실은,주님의변화산사건에서큰광명체,곧‘해’(sun)로도표현되었습니다.기록되기를,The most ancient church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love itself. The celestial angels also do not know what faith is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The universal heaven is a heaven of love, for there is no other life in the heavens than the life of love. From this is derived all heavenly happiness, which is so great that nothing of it admits of description, nor can ever be conceived by any human idea. Those who are under the influence of love, love the Lord from the heart, but yet know, declare, and perceive, that all love, and consequently all life—which is of love alone—and thus all happiness, come solely from the Lord, and that they have not the least of love, of life, or of happiness, from themselves. That it is the Lord from whom all love comes was also represented by the great luminary or “sun” at his transfiguration, for it is written: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그얼굴이해같이빛나며옷이빛과같이희어졌더라(마17:2)Hisfacedidshineasthesun,andhisraimentwaswhiteasthelight(Matt. 17:2).
얼굴은가장안쪽의것들을뜻하고,옷은거기서나오는것들을뜻합니다.따라서주님의신성(the Lord’s Divine)은‘해’(sun),곧사랑으로,그의인성(his human)은사랑에서나오는지혜,곧‘빛’(light)으로상징되었습니다.Inmost things are signified by the face, and the things that proceed from them by the raiment. Thus the Lord’s Divine was signified by the “sun,” or love; and his human by the “light,” or wisdom proceeding from love.
해설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 넷째 날의 ‘두큰광명체’가 왜 처음에는 함께 ‘큰광명체들’이라 불리다가, 이어서는 하나는 ‘더큰광명체’, 다른 하나는 ‘더작은광명체’라고 불리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속뜻에서 사랑과 신앙은 모두 사람을 밝히는 광명체이지만, 둘의 관계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습니다. 사랑이 ‘더큰광명체’이고 신앙이 ‘더작은광명체’입니다. 또한 사랑은 ‘낮을다스리고’, 신앙은 ‘밤을다스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랑이 신앙보다 더 중요하다는 가치 비교가 아닙니다. AC.30에서 이미 밝혔듯이 생명 있는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신앙은 서로 경쟁하는 두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때문에 둘 다 광명체이지만 사랑은 더 큰 광명체로, 신앙은 더 작은 광명체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아르카나’라고 부르면서, 특히 당시의 ‘마지막시대’에는 이 사실이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세대의종말’에 이르러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순서입니다. 그는 ‘신앙이없어져서사랑도없어졌다’고 하지 않고, ‘사랑이거의없고, 그결과신앙도거의없다’고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AC.32가 말하려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24:29을 인용합니다. ‘해가어두워지며달이빛을내지아니하며별들이하늘에서떨어진다’는 말씀에서, ‘해’는 사랑을, ‘달’은 신앙을, ‘별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속뜻에서는 사랑이 어두워지고, 신앙이 빛을 잃으며, 신앙에 관한 지식들까지 그 본래의 자리를 잃는 교회의 영적 상태가 묘사됩니다.
이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만 따로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이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교리와 신앙고백과 성경 지식이 남아 있을 수 있어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분리되면 그것은 본래의 생명을 잃어 갑니다. 그래서 해가 어두워질 때 달도 빛을 내지 못하고 별들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을 예로 듭니다. 태고교회는 ‘사랑자체외에다른신앙을알지못했다’고 하며,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속한신앙’ 외의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진리가 없었다거나 신앙에 속한 것을 몰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과 신앙이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온천국은사랑의천국’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없으며, 모든 천국의 행복도 여기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천국의 행복은 단순히 좋은 환경이나 즐거운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천적 상태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모든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생명과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 이것은 AC.29-30에서 계속 이어져 온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셋째 날의 사람은 아직 자신이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주님의 변화산 사건과 연결합니다. 마17:2에서 주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는 ‘얼굴’이 가장 안쪽의 것들을, ‘옷’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신성은 ‘해’, 곧 사랑으로 표현되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는 ‘빛’으로 표현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같은 질서가 나타납니다. 사랑이 근원이고, 지혜와 빛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AC.32에서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라는 것은 단순한 상응표 하나를 배우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상응 안에는 거듭남과 천국의 근본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도 빛을 잃고, 신앙에 관한 지식들 역시 본래의 영적 기능을 잃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근원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천적 천사들이 사랑과 생명과 행복을 자기에게서 조금도 얻지 않는다고 지각하듯, 사람의 참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역시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더 많은 진리를 알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가 사람 안에서 회복되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임을 점점 더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AC.32에서 ‘더큰광명체’와 ‘더작은광명체’가 보여 주는 아르카나입니다. 사랑은 해처럼 중심에 있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질서가 사라진 시대에 바로 그 질서를 다시 밝혀 주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글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창1:14-17)
AC.31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의 의미가 사랑과 신앙이며, 또한 ‘해, 달, 별’(sun, moon, and stars)이라 한다는 사실은 선지자들의 글을 보면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처럼 말입니다.That the “great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and are also called “sun, moon, and stars,”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Ezekiel: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32:7, 8)When I shall extinguish thee, I will cover the heavens and make the stars thereof black; I will cover the sun with a clou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ll the luminaries of the light of heaven will I make black over thee, and I will set darkness upon thy land(Ezek. 32:7–8).
이 구절들은 바로와 애굽을 다루는데, 말씀에서 바로와 애굽은 감각적인 것과 단지 지식적인 것의 원리를 뜻합니다. 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사야에서도 그렇습니다.In this passage Pharaoh and the Egyptians are treated of, by whom are meant, in the Word, 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knowledge [sensuale et scientificum]; and here, that by things of sense and of mere knowledge, love and faith had been extinguished. So in Isaiah:
9보라 여호와의 날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사13:9, 10)The day of Jehovah cometh to set the land in desolation, for the stars of heaven and the constellations thereof shall not give their light; the sun is darkened in his going forth, and the moon shall not cause her light to shine(Isa. 13:9–10).
요엘에서도입니다.Again, in Joel:
1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이제 임박하였으니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10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욜2:1-2, 10)The day of Jehovah cometh,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the earth trembleth before him, the heavens are in commotion; the sun and the moon are blackened, and the stars withdraw their brightness(Joel 2:1–2, 10).
[2]다시 이사야에서는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곧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Again, in Isaiah, speaking of the advent of the Lord and the enlightening of the gentiles, consequently of a new church, and in particular of all who are in darkness, and receive light, and are being regenerated: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20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사60:1-3, 20)Arise, shine, for thy light is come; behold darkness covers the earth, and thick darkness the peoples, and Jehovah shall arise upon thee, and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thy sun shall no more go down, neither shall thy moon withdraw itself, for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Isa. 60:1–3, 20).
시편도 이렇게 말합니다.So in David: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6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5-9)Jehovah in intelligence maketh the heavens; he stretcheth out the earth above the waters; he maketh great luminaries, the sun to rule by day, the moon and stars to rule by night(Ps. 136:5–9).
3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4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시148:3, 4)Glorify ye Jehovah, sun and moon, glorify him, all ye stars of light, glorify him, ye heavens of heavens, and ye waters that are above the heavens(Ps. 148:3–4).
[3]이 모든 구절에서 ‘광명체들’(luminaries)은 사랑과 신앙을 뜻합니다.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나타내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습니다. 그 교회의 모든 규례는 주님을 대표, 즉 표상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이 등불에 관한 기록입니다.In all these passages,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It was because “luminaries” represented and signified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at it was ordained in the Jewish church that a perpetual luminary should be kept burning from evening till morning, for every ordinance in that church was representative of the Lord. Of this luminary it is written:
20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감람으로 짠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21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출27:20, 21)Command the sons of Israel that they take oil for the luminary, to cause the lamp to ascend continually: in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without the veil, which is before the testimony, shall Aaron and his sons order it from evening even until morning, before Jehovah(Exod. 27:20–21).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뜻임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적절한 곳에서 밝힐 것입니다.That these things signify love and faith, which the Lord kindles and causes to give light in the internal man, and through the internal man in the external,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shown in its proper place.
해설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의 AC.30에서 밝힌 ‘큰광명체들’의 의미를 말씀 전체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창1의 해와 달과 별은 단순히 자연계의 천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랑과 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거나 빛을 잃는 장면은 자연계의 천체에 일어날 사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쇠하거나 소멸되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겔32:7-8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바로와 애굽을 다루는데, 그는 말씀에서 바로와 애굽이 여기서는 ‘감각적인것과단지지식적인것의원리’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상태가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감각이나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도 ‘단지감각적인것’, ‘단지지식적인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감각과 기억 지식에만 머물러 그것을 영적인 것보다 앞세울 때, 사랑과 신앙의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13:9-10과 욜2:1-2,10에서도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여기서 인용하는 이유는 같은 상응이 말씀의 여러 곳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문자적으로는 천체이지만, 속뜻에서는 사랑과 신앙에 관계된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것들의 빛이 사라지는 모습으로 사랑과 신앙이 쇠하고 어두워지는 상태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AC.31은 어두워짐만 말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사60:1-3,20에서는 반대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새 교회에 관한 것이며, 특별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앞에서는 해와 달과 별의 빛이 사라졌지만 여기서는 빛이 임하고, 여호와께서 영원한 빛이 되시며, 해가 다시 지지 않고 달도 물러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랑과 신앙의 빛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이 이 말씀을 통하여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AC.30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앞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것들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해와 달의 빛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영적 빛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랑하고 믿고 진리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창조 넷째 날에 광명체들이 ‘하늘의궁창’에 놓이는 것도 이러한 사랑과 신앙이 속 사람 안에 자리 잡는 거듭남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시136:5-9와 시148:3-4도 인용합니다. 시136에서는 큰 빛들과 해와 달과 별이 창조되고 낮과 밤을 주관하는 모습이 나오며, 시148에서는 해와 달과 밝은 별들이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이러한 여러 인용을 통하여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려는 핵심은 말씀에서 ‘광명체들’이 사랑과 신앙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창1의 넷째 날도 자연계의 천체에 관한 문자적 서술 안에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담고 있습니다.
AC.31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의미가 유대교회의 예배 규례와도 연결됩니다. 출27:20-21에서는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사용하여 회막 안의 등불을 저녁부터 아침까지 계속 밝히도록 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이러한 규례가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유대교회의 규례들이 주님을 표상하는 것이었으므로, 성막의 등불 역시 단순히 공간을 밝히기 위한 조명 이상의 대표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의미를 마지막 문장에서 매우 중요하게 정리합니다. 그 등불에 관한 규례는 주님께서 ‘속사람안에서사랑과신앙을불붙이시고빛나게하시며,속사람을통해겉사람안에서도그렇게하시는것’을 뜻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자세한 의미를 여기서 모두 설명하지 않고 ‘적절한곳에서’ 밝히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AC.31에서는 등불의 세부적인 상응을 앞당겨 확정하기보다,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주님이며 그것들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나타난다는 큰 원리를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1의 여러 성경 인용은 각각 별개의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모아 놓은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이사야, 요엘, 시편, 출애굽기를 가로질러 하나의 일관된 원리를 보여 줍니다.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면 광명체들이 어두워지는 것으로 표현되고, 사랑과 신앙이 주님에게서 새롭게 받아들여지면 빛이 임하는 것으로 표현되며, 예배의 표상 안에서는 계속 밝혀지는 등불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AC.31의 중심은 ‘해와달과별의상응을아는것’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중심은 우리의 사랑과 신앙에 생명을 주고 빛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에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스스로 빛의 근원이 아니듯, 사람 안의 참된 사랑과 신앙도 사람 자신의 proprium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며, 그것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의 삶에도 나타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창조 넷째 날의 광명체들을 통하여 AC.31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중요한 질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