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땅을 펼쳤고(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라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선지자들이 아주 흔히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이사야에 보면, To “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 is a common form of speaking with the prophets, when treat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A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am Jehovah that maketh all things,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lone, that spreadeth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또한 주님의 강림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And again, where the advent of the Lord is openly spoken of: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2:3)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Isa. 42:3);

 

이는 오류들을 깨뜨리거나 욕정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굽히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that is, he does not break fallacies, nor quench cupidities, but bends them to what is true and good; and therefore it follows: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42:5) Jehovah God createth the heavens, and stretcheth them out; he spreadeth out the earth, and the productions thereof; he giveth breath unto the people upon it, and spirit to them that walk therein (Isa. 42:5).

 

이와 같은 뜻을 지닌 다른 구절들은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Not to mention other passages to the same purport.

 

해설

AC.25는 앞선 AC.24에서 제시한 거듭남의 중요한 원리를 선지서의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AC.24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주님께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구별하시며, 사람이 아직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여기는 것들, 심지어 감각의 오류와 욕정까지도 사용하여 그를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이끄시고 굽히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25는 선지자들이 사용하는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친다는 표현 역시 바로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는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먼저 사44:24가 인용됩니다.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없이 땅을 펼쳤고.문자적으로 읽으면 천지 창조를 말하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이 사람의 거듭남을 말할 때에도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친다는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고 합니다. 바로 앞 AC.24에서 속 사람을 하늘’, 겉 사람을 과 연결했으므로, 여기서도 우리는 한 사람 안에서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한 가지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난다면 주님께서 그 안의 잘못된 것들을 모두 없애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AC.25는 놀랍게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강림을 말하는 사42:3을 인용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그리고 이 말씀을 오류들을 깨뜨리거나 욕정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굽히신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오류욕정이라는 말 때문에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오류와 욕정 자체가 좋은 것이므로 그대로 보존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주님께서 아직 거듭나지 않은 인간의 현재 상태를 단번에 파괴하여 다른 존재로 바꾸시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신다는 데 있습니다. AC.24가 이미 설명했듯이, 거듭나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의 현재 상태를 통하여 그를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는 쪽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잘못된 것을 통하여 올바른 것으로 인도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선한 일을 하면서도 내가 좋은 일을 했다는 만족감을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AC.25가 직접 제시한 사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원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불완전한 동기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선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 선을 행하도록 이끄시면서 점차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불완전한 상태 자체를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그 상태에 영원히 머물게 하지 않고 참되고 선한 것을 향하여 굽히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굽히신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와 현재 상태를 무시하고 강제로 선한 사람을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것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것들을 통하여 점차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AC.24에서 천국의 아르카나라고까지 한 내용입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이미 완전해진 뒤에 주님께서 시작하시는 일이 아니라, 아직 오류와 욕정과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들이 남아 있는 바로 그 사람을 붙드시고 선과 진리를 향하여 이끄시는 과정입니다.

 

이런 문맥에서 사42:5가 이어지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소산을 내시며라고 다시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AC.25가 사42:3과 사42:5를 이어 인용하는 것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주님의 방식과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치는거듭남의 일이 서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께서는 현재의 인간을 단순히 부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를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이끄시고 굽히시면서 새로운 질서를 이루어 가십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일이 궁극적으로 주님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44:24에서는 여호와께서 홀로하늘을 펴고 땅을 펼치신다고 하고, 42:5에서도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을 펼치신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실제로 진리를 배우고, 악과 싸우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선과 진리의 근원과 사람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AC.24-25의 흐름은 오히려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에게서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여기다가 점차 그것들이 주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 가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AC.25에서 하늘을 펴고 땅을 펼친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창조의 비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거듭남의 질서 안으로 이끌어 가시는 일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인간의 현재 모습을 무시한 강제적 파괴가 아니라,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그가 서 있는 자리에서 붙드시고 참되고 선한 것을 향하여 이끄시고 굽히시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사42장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이 AC.25에 인용된 중요한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오류와 욕정을 선이라고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때문에 우리를 버리거나 단번에 부수어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불완전한 상태에서부터 우리를 이끄셔서, 마침내 사람에게 속한 것보다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가 삶을 이끌도록 하십니다. AC.25가 보여 주는 거듭남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인도입니다.

 

심화

1.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42:3)

 

AC.25, 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사42:3)

AC.25.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사42:3) AC.25의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인간관과 거듭남 이해가 매우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 꺼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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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 창1:8,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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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AC.24-25)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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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1:6, 7)

 

AC.24

하나님의 영, 곧 주님의 자비가 참되고 선한 지식을 낮으로 이끌어 내시고, 첫 빛, 곧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는 선과 진리는 없는 그런 빛을 주신 후, 주님은 속 사람과 겉 사람, 곧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과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2)을 구별하십니다. 속 사람을 궁창(expanse),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을 궁창 위의 물(the waters above the expanse)이라 하며,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이라 합니다. After the spirit of God, or the Lord’s mercy, has brought forth into day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and has given the first light, that the Lord is, that he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and that there is no good and truth but from him, he the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consequently between the knowledges [cognitiones] that are in the internal man, and 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that belong to the external man.2 The internal man is called an “expanse”; the knowledge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above the expanse”; and the memory-knowledges of the ex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

 

2. 지식(knowledges, cognitiones)이란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들을 뜻하는데, 예를 들면 우리가 ‘나는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다’라고 말할 때의 그 앎입니다. 반면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은 외적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들로, 신학적인 것이든 그 밖의 것이든 온갖 종류가 대량으로 축적되어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 두 용어에 대한 스베덴보리 자신의 정확한 정의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27번, 896번, 1486번, 2718번, 5212번을 보시고, 또 편집자의 서문 주해도 참고하세요. Knowledges [cognitiones] are what we really know, as when we say “I do not merely think so, I know it.”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re what we have in the external memory—a vast accumulation of all kinds, theological and otherwise. For precise definitions of these words by Swedenborg himself, see Arcana Coelestia, n. 27, 896, 1486, 2718, 5212. See also the Reviser’s Prefatory Notes. [Reviser]

 

[2]사람은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에는 속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며, 더욱이 그 성질과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속에 깊이 잠겨 있으며, 그 결과 속 사람에 속한 것들까지 그 안에 잠기게 하여, 서로 구별되는 것들을 혼란스럽고 어두운 하나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하시고, 그다음에 물과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하시는 것입니다. 이후 나오는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고는 아직은 아니고 말입니다. Man, before he is being regenerated, does not even know that any internal man exists, much less is he acquainted with its nature and quality. He suppo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to be not distinct from each other. For, being immersed in bodily and worldly things, he has also immersed in them the things that belong to his internal man, and has made of things that are distinct a confused and obscure unit. Therefore it is first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then,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but not,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as is afterwards said in the next verses: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1:7, 8)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Gen. 1:7–8).

 

[3] 따라서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다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속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속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은 오직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이런 실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이러한 자기 본성, 곧 이런 자신의 것들을 통해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궁창 아래의 물들의 구별이 언급되고, 그다음에 궁창 위의 물들이 언급됩니다. 또한 이것은 천국의 아르카나인데, 사람은 감각의 착각이나 욕정과 같은 자기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주님에 의해 참된 것과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저녁에서 아침으로, 곧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또는 (earth)에서 하늘(heaven)로 진행되며, 이런 이유로 이제 궁창, 곧 속 사람을 가리켜 하늘(heaven)이라 하는 것입니다. The next thing therefore that man observe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is that he begins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man, or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which are of the Lord alone. Now as the external man, when being regenerated, is of such a nature that he still supposes the goods that he does to be done of himself, and the truths that he speaks to be spoken of himself, and whereas, being such, he is led by them of the Lord, as by things of his own, to do what is good and to speak what is true, therefore mention is first made of a distinction of the waters under the expanse, and afterwards of those above the expanse. It is also an arcanum of heaven, that man, by things of his own, as well by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by cupidities, is led and bent by the Lord to things that are true and good, and thus that every movement and moment of regeneration,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proceeds from evening to morning, thu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or from “earth” to “heaven.” Therefore the expanse, or internal man, is now called “heaven.”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둘째 날, 곧 ‘궁창’의 창조가 인간 거듭남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장 체계적으로 풀어 주는 핵심 본문입니다. 앞선 글들에서 주님의 자비가 리메인스(remains)를 품고, 빛이 처음 인식되기 시작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내적 구조의 분화’,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질서를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참되고 선한 지식을 ‘’으로 이끌어 내시고, 주님 자신이 선 자체이시며, 진리 자체이시고, 모든 선과 진리가 그분으로 말미암는, 그런 첫 빛을 주신 뒤에야, 비로소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구별하십니다. 다시 말해, ‘구별은 빛 이후에만 가능’합니다.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이 섞여 있고, 구별은 혼란을 낳을 뿐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을 가리켜 ‘궁창(expanse)이라고 합니다. 궁창을 가리켜 위와 아래를 나누는 중간 영역이면서, 동시에 하늘이라고 하는데요, 이는 속 사람이라는 것이 단순히 마음의 깊은 층이라는 심리적 개념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머무는 하늘의 영역임을 뜻합니다.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궁창 위의 물’이라 하고,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이라 합니다. 이 구분은 지식의 내용 차이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것들이 속하는 차원과 쓰임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이전의 인간은 이 구별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속 사람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혹시 알아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속에 깊이 잠겨 있고, 그 결과 속 사람의 것들까지도 동일한 차원으로 끌어내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이 섞이면, 명확한 구별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혼탁한 하나로 느껴집니다. 이것이 거듭남 이전 인간의 내면 상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본문에서도 매우 섬세한 표현이 사용됩니다. 처음에는 ‘물 가운데 궁창이 있으라’라고만 하십니다. 곧바로 위와 아래의 물을 명확히 나누라고는 하지 않으시고요. 이는 사람이 처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인식할 뿐, 그 안의 질서와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후에야 비로소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의 구별이 명확히 언급되는데, 이런 문장 순서 자체가 인간 거듭남의 실제 진행 순서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중요한 인식을 하나 얻게 됩니다. 속 사람이 존재하며, 그 안에 있는 것들은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이 와중에도 그는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걸로 여기고,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 생각의 산물로 여깁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문제 삼기보다는 오히려 ‘주님의 섭리의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여전히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그 선과 진리를 통해서도, 사람을 실제로 선과 진리로 이끄십니다. 즉, 주님은 인간의 본성과 착각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먼저 궁창 아래의 물, 곧 겉 사람의 지식과 활동이 언급되고, 그다음에야 궁창 위의 물이 언급됩니다. 이는 인간의 경험 순서에 맞춘 주님의 배려, 신적 배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천국의 아르카나를 밝힙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것들, 곧 감각의 착각과 욕정에 의해서조차, 주님에 의해 참되고 선한 것들한테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인간의 오류와 약함마저도 주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뜻이지요. 물론 이것이 자기중심적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듭남의 실제 과정이 얼마나 점진적이고 주님의 인내로 가득한지를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진행됩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방향성의 선언입니다.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땅에서 하늘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 주님의 불변의 방식입니다. 이 과정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고, 수없이 반복되며 점점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마침내 궁창, 곧 속 사람은 ‘하늘’이라 불립니다. 이는 인간 안에 하늘이 세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하늘과 연결될 수 있는 내적 영역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 하늘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질서와 자비로 세우신 것입니다. AC.24는 이처럼 거듭남의 구조적 중심을 밝혀 주며, 창세기 1장의 둘째 날이 단순한 우주론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재조직에 대한 계시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심화

1.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C.24, 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C.24.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기억 지식’이라는 표현은 처음 들으면 낯설게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아주 평범한 종류의 지식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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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 창1:6-7,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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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 창1:5, '날'(day)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 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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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living soul) 짐승(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그는 형상(image)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들이 그의 음식(food) 됩니다. 또한 그의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로부터 싸움이 일어나며,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고, 그는 천적 인간이 됩니다. The sixth state is when, from faith, and thence from love, he speaks what is true, and does what is good: the things which he then brings forth are called theliving souland thebeast.And as he then begins to act at once and together from both faith and love,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image.His spiritu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such things as belo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nd to works of charity, which are called hisfood”; and his natur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those which belong to the body and the senses; whence a combat arises, until love gains the dominion, and he becomes a celestial man.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가축을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지면의 맺는 모든 채소와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24-31)

 

해설

AC.11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며,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이 생기를 지닌 것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AC.12의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섯 번째 상태를 단순히 사랑의 단계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지금은 이 표현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를 먼저 신앙이 사랑을 만들어 내고, 사랑이 뒤따라 행동한다는 식의 고정된 공식으로까지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AC.12에서 분명한 것은 이제 신앙과 사랑이 서로 떨어져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행동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앞의 상태들과 비교하면 여섯 번째 상태의 특징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AC.9의 세 번째 상태에서는 경건한 말과 선한 행위가 나타났지만 아직 생기가 없었습니다. AC.10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었고, AC.11에서는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고 생기 있는 것들을 산출했습니다. 이제 AC.12에서는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함께 행동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짐승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의 여섯째 날에 등장하는 생물들과 연결됩니다. 다만 AC.12는 개요이므로 여기서 짐승각각의 세부적인 상응을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의미는 뒤에서 창1의 여섯째 날을 본격적으로 해설하면서 더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여기서 우선 중요한 것은 다섯째 상태에서 이미 생기를 지닌 것들이 등장했고, 여섯째 상태에서도 사람에게서 살아 있는 것들이 산출된다는 흐름입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식물에 이어 물고기와 새가 나타나고, 다시 땅의 생물과 사람이 등장하는 순서가 거듭남의 상태들과 연결되어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AC.12에서 매우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사람은 이제 영적 인간이 되며, 그를 형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26-27하나님의 형상과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형상의 모든 교리적 의미를 한꺼번에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12가 지금 직접 제시하는 것은 사람이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하기 시작함으로써 영적 인간이 되고, 그 영적 인간을 형상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형상이라고 하는지, ‘모양과는 어떻게 다른지는 뒤의 관련 본문에서 더 자세히 밝혀집니다.

 

따라서 현재 단계에서 형상을 단순히 외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정도는 분명합니다. 1하나님의 형상은 여기서 거듭난 영적 인간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형상이란 정확히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동하는 구조다라고 하나의 정의로 고정하기보다, AC.12가 제시하는 관계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이 영적 인간에게 두 종류의 생명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영적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적 생명입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됩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그의 음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음식이라는 표현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람의 몸이 음식으로 유지되는 것처럼, 스베덴보리는 영적 생명도 그것을 기쁘게 하고 유지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AC.12에서 그것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입니다.

 

다만 이것을 이제 진리 공부와 선행이 의무가 아니라 즐거움이 되었다고 너무 심리적으로 구체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원문은 영적 생명이 그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깊습니다.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영적 생명을 기쁘게 하고 유지하는 음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자연적 생명도 존재합니다.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됩니다. 영적 인간이 되었다고 해서 몸과 감각에 속한 자연적 생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것 역시 계속 존재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두 생명으로부터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AC.12가 직접 말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영적 인간이 되고 형상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해서 모든 내적 갈등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로,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기 때문에 그로부터 싸움이 일어납니다.

 

여기서도 모든 자연적 즐거움 자체를 악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12는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을 악이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이 문장의 핵심은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이 각각 무엇으로 기뻐하고 유지되는지를 설명하고, ‘이로부터 싸움이 일어난다고 하는 데 있습니다.

 

그 싸움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AC.12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입니다. 그리고 그 후 사람은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합니다.

 

이 마지막 문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이 이미 영적 인간이 되어 형상이라 불리지만,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설명을 끝내지 않습니다.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 사이의 싸움이 계속되고, 사랑이 지배권을 얻은 후에는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합니다.

 

다만 여기서 천적 인간의 상태를 너무 앞서 상세하게 묘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천적 인간은 아무런 갈등 없이 본능적으로 선을 행한다’, ‘신앙은 이제 완전히 사랑에 흡수된다와 같은 구체적인 설명은 이 한 문장만으로 모두 확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AC.12가 지금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랑이 지배권을 얻은 후 그가 천적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지배권이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AC.12는 사랑이 단순히 신앙과 나란히 존재한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싸움이 계속되어 마침내 사랑이 지배권을 얻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섯 번째 상태의 영적 인간과 그 후의 천적 인간 사이에는 스베덴보리가 분명히 구별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섯 번째 상태를 곧바로 거듭남의 완전한 종착점이라고 말하는 것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영적 인간이 되고 형상이라 불리지만, 아직 싸움이 있으며 사랑이 지배권을 얻는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AC.12 자체가 그 뒤에 천적 인간의 상태를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1의 여섯째 날 다음에 일곱째 날이 있다는 사실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계를 지금 여기서 모두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12에서는 여섯 번째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그 상태 뒤에도 사랑이 지배권을 얻기까지 싸움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AC.12를 통해 우리는 거듭남을 단순히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는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부족하다는 것을 다시 보게 됩니다. 이미 선한 말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하는 단계가 있었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불붙는 단계가 있었으며, 생기 있는 것들이 나타나는 단계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함께 행동하는 영적 인간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영적 인간에게도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이 함께 있으며 그로부터 싸움이 일어납니다. 거듭남의 깊이는 단순한 외적 행동의 변화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습니다.

 

따라서 AC.12의 여섯 번째 상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며,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함께 행동함으로써 형상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문장은 아닙니다.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으로부터 싸움이 일어나고, 그 싸움은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 후 사람은 천적 인간이 됩니다. AC.12는 여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 너머에 있는 상태까지 이렇게 짧게 열어 보여 줍니다.  

 

심화

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 심화 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심화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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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창1 개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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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창1 개요, '다섯 번째 상태'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지닌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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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지닌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 하늘의 새들(birds of the heavens)이라 불립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 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fish of the sea,and thebirds of the heavens.

 

 

해설

AC.10의 네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으며, 신앙과 체어리티가 그의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AC.11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그 신앙으로부터 실제로 말하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할 표현은 신앙으로 말한다입니다. 앞의 세 번째 상태에서도 사람은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선들은 아직 생기가 없었고, 네 번째 상태에 이르러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었습니다. 이제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그 신앙으로부터 말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AC.11이 말하는 변화는 단순히 사람이 종교적인 말을 더 많이 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경건한 말 자체는 이미 앞 단계에서도 있었습니다. 차이는 그 말이 이제 신앙으로부터나온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AC.11이 다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면서 가장 먼저 제시하는 특징입니다.

 

이어지는 그로써 진리와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표현은 조금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확증한다는 말을 곧바로 삶의 경험을 통하여 진리와 선이 참됨을 검증한다고 풀 필요는 없습니다. AC.11 자체는 그렇게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선 원문 그대로,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면서 진리와 선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확증한다는 말 때문에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거나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떠올릴 필요도 없습니다. 문장의 대상이 분명히 진리와 안에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말하면서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AC.11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가 이어집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지닌 것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세 번째 상태와 매우 중요한 대조를 이룹니다. AC.9에서는 사람이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 선들이 아직 생기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이 생기를 지닌 것들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므로 생기를 지닌다는 표현은 다섯 번째 상태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이제 주님의 생명이 그의 모든 말과 행동 속에 직접 흘러들어 실제적인 영적 생명력이 흐른다는 식으로 세부적인 작동 과정을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AC.11이 직접 말하는 것은 네 번째 상태를 지나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사람에게서 이제 생기를 지닌 것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생기 있는 것들을 바다의 물고기하늘의 새들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창1의 다섯째 날에 물에서 생물들이 나오고 새들이 하늘을 나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AC.11은 아직 물고기는 정확히 무엇이고 새는 정확히 무엇인가를 세부적으로 해설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지금은 여섯 상태를 개괄하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물고기를 특정한 종류의 기억 지식으로, 새를 특정한 종류의 고차원적 사고로 곧바로 세분하기보다,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산출되는 생기 있는 것들이 창1의 물고기와 새로 표현된다는 데 머무르는 것이 좋습니다.

 

그 구체적인 의미는 뒤에서 다섯째 날의 본문을 해설할 때 더 자세히 밝혀집니다. 개요인 AC.11에서 뒤의 설명을 모두 앞당겨 넣으면 오히려 지금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려는 여섯 상태의 단순하고 선명한 흐름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AC.9생기 없는 것들AC.11생기 있는 것들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바로 AC.10의 네 번째 상태입니다. 거기에서 사람은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았으며, 신앙과 체어리티가 그의 속 사람 안에서 불붙었습니다. 그 다음 상태인 AC.11에서 사람은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며,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이 생기를 지니게 됩니다.

 

이 순서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 상태에서는 이미 선한 말과 행위가 있었지만 아직 생기가 없었습니다. 네 번째 상태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었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신앙으로부터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며 생기 있는 것들이 산출됩니다.

 

따라서 다섯 번째 상태를 단순히 신앙이 지식에서 삶으로 바뀌는 단계라고 요약하는 것도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AC.11은 앞의 상태에서 신앙이 단순한 지식에 불과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네 번째 상태에서 이미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었다고 했습니다. 다섯 번째 상태의 특징은 그 다음에 나타나는 신앙으로 말함’, ‘진리와 안에서 자신을 확증함’, 그리고 생기 있는 것들의 산출입니다.

 

또한 이 단계에서 사람의 자유와 책임이 얼마나 커지는지, 혹은 이때부터 사람이 자신의 신앙과 행동의 불일치를 얼마나 더 분명하게 인식하는지에 대해서도 AC.11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내용이 스베덴보리의 다른 가르침과 연결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짧은 개요 안에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섯 번째 상태를 아직 신앙이 중심이고 사랑은 뒤에 있으며, 다음 단계에서 사랑이 주도권을 잡는다는 식으로 너무 구체적인 심리적 발전 과정으로 재구성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다음 AC.12가 여섯 번째 상태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그 글 자체에서 충분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AC.11에서는 오히려 한 가지 매우 분명한 사실을 붙들면 됩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이 산출하는 것들의 성질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경건한 말과 선한 행위가 있으면서도 생기 없는 것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생기를 지닌 것들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창조 이야기의 순서와 연결합니다. 셋째 날에는 땅에서 식물이 나왔고, 다섯째 날에는 물고기와 새라는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이 나타납니다. 거듭남의 개요에서도 이에 대응하여 세 번째 상태의 선들은 아직 생기가 없는 것으로 불렸고, 다섯 번째 상태에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지닌 것으로 불립니다.

 

이 점은 창1의 창조 순서가 왜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을 표현하는지가 조금씩 선명해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자연계의 생물학적 창조와 영적 거듭남의 모든 세부를 일대일로 설명하려 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하는 대응 관계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AC.11의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며,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이 생기를 지니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생기 있는 것들이 창1바다의 물고기하늘의 새들로 표현됩니다.

 

AC.11은 그 이상을 아직 요구하지 않습니다. 물고기와 새의 세부적인 의미도, 신앙과 사랑의 이후 관계도 뒤에서 각각 밝혀질 것입니다. 지금은 네 번째 상태에서 속 사람 안에 불붙은 신앙과 체어리티에 이어, 다섯 번째 상태에서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되며 생기 있는 것들이 나오기 시작한다는 흐름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 무슨 뜻인가?

 

AC.11, 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심화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는 무슨 뜻인가? AC.11을 처음 읽으면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라는 표현에서 조금 멈추게 됩니다. 우리말의 ‘확증하다’는 보통 어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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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창1 개요, '여섯 번째 상태'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산 영’(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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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창1 개요, '네 번째 상태'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것들을 행했으나,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겪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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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것들을 행했지만, 그것은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였으며,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가 그의 사람 안에서 불붙게 되었으며, 이것들을 광명체(luminaries)라고 합니다. The fourth state is when the man becomes affected with love, and illuminated by faith. He indeed previously discoursed piously, and brought forth goods, but he did so 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 and not from faith and charity; wherefore faith and charity are now enkindled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alled twoluminaries.

 

 

해설

AC.9의 세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이미 회개하여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아직 생기가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그 선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AC.10의 네 번째 상태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은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게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세 번째 상태에서도 이미 경건한 말과 선한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네 번째 상태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선한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으로 보면 이전에도 상당히 신앙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AC.10은 그 이전의 경건한 말과 선한 행위가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우러나온 은 아니었다고 분명히 구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였다고 말합니다. 앞의 AC.8에서 시험, 불행, 슬픔을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고 했던 설명과 이어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지나면서 AC.9에서는 실제로 경건한 말과 선한 행위가 나타났지만, 아직 그것들의 생명이 신앙과 체어리티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AC.10의 변화는 단순히 나쁜 행동을 하던 사람이 좋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는 변화가 아닙니다. 좋은 말과 행동은 이미 앞 단계에 있었습니다. 이제 달라지는 것은 그것들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시험과 곤경의 결과로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했다면, 이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합니다.

 

불붙는다는 표현은 원문의 enkindled를 옮긴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단지 사람에게 알려지거나 기억되는 정도가 아니라 속 사람 안에서 불붙는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AC.10에서 네 번째 상태를 이전 상태와 구별하는 핵심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한 첫 문장의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는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여기서 사랑과 신앙은 단순한 종교적 지식이나 외적인 행위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감동됨, 신앙에는 밝아짐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이것을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다만 AC.10 한 단락에서 사랑에 감동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적 체험을 의미하는지까지 세밀하게 묘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별한 종교적 감격이나 강렬한 감정을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본문을 넘어섭니다. AC.10이 직접 말하는 범위에서는 이전과 달리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살아 있게 되는 변화에 주목하면 충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두 광명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14 이하에서 넷째 날에 등장하는 두 큰 광명체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AC.10은 아직 두 광명체 각각의 상응을 자세히 설명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직접 말하는 것은 속 사람 안에서 불붙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두 광명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짧은 개요에서 두 광명체 각각의 의미를 너무 앞서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뒤에서 창1의 넷째 날을 본격적으로 해설할 때 스베덴보리는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 낮과 밤, 해와 달 등의 의미를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AC.10에서는 여섯 상태 전체를 개괄하는 흐름 안에서 네 번째 상태의 핵심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핵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이전에도 경건한 말과 선한 행위가 있었지만 이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습니다. 그래서 네 번째 상태는 외적 행동의 변화보다 그 행동의 내적 근원이 달라지는 상태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적 근원이 달라진다는 표현도 조심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AC.10이 사람이 이때 비로소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교리를 완전히 깨닫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내용을 이 한 단락에 미리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변화는 이전의 경건한 말과 선한 행위가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던 데 비하여,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AC.9생기 없는 AC.10의 차이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실제로 선을 행했지만 아직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겼습니다. 네 번째 상태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진전은 단순히 선행의 양이 많아지는 것으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같은 경건한 말과 선한 행위라도 그것을 낳는 내적 상태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또한 AC.10은 시험과 곤경 자체를 거듭남의 생명으로 보지 않습니다. 앞 단계에서 그것들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고, 세 번째 상태의 경건한 말과 선한 행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상태를 특징짓는 것은 더 이상 시험과 곤경이 아니라 속 사람 안에서 불붙은 신앙과 체어리티입니다.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거듭남을 고난 때문에 착해지는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AC.10이 보여 주는 네 번째 상태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 자체가 속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전의 외적인 압박과 곤경에서 나온 반응과 구별되는 새로운 상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두 광명체라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넷째 날 광명체들이 등장하듯,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에서도 신앙과 체어리티가 광명체로 나타납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이것을 더 세밀하게 나누기보다,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신앙과 체어리티가 불붙는 것이 창1의 두 광명체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AC.7에서 첫 번째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였습니다. AC.8에서는 주님의 것과 사람 자신의 것이 구별되고 리메인스가 드러났으며, AC.9에서는 사람이 회개하여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AC.10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불붙습니다. 이렇게 여섯 상태의 개요는 한 단계씩 앞의 상태와 구별되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네 번째 상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전에도 경건한 말과 선한 행위는 있었지만, 이제 사람은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으며, 신앙과 체어리티가 그의 사람 안에서 불붙기 시작한다.이것이 AC.10이 말하는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이며, 바로 이 신앙과 체어리티가 두 광명체라고 불립니다.

 

 

 

 

AC.11, 창1 개요, '다섯 번째 상태'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지닌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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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세 번째 상태'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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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을 하며, 체어리티(charity) 행위들과 같은 선들을 행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는데, 그가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들을 연한 (tender grass), 또한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나중에는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라고 합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These goods are called thetender grass,and also theherb yielding seed,and afterwards thetree bearing fruit.

 

해설

AC.7의 첫 번째 상태에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주님의 자비가 첫 번째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AC.8의 두 번째 상태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기 시작하고,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드러났습니다. 이제 AC.9의 세 번째 상태에 이르면 사람의 말과 행위에 실제적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분명하게 회개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회개를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슬퍼하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감정으로만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AC.9에서 회개는 실제 말과 행위의 변화와 함께 나타납니다. 사람은 사람으로부터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을 하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으로부터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앞의 AC.8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하는 것들의 구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상태에서는 그 속 사람으로부터 사람의 말과 행위에 어떤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회개는 단순히 외적인 행동 몇 가지를 고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뜻밖의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말하고 실제로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행하는데도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여전히 생기가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AC.9 자체가 곧바로 밝혀 줍니다. ‘그가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가 선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선을 행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선의 근원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세 번째 상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선한 행위의 유무만으로 그 상태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같은 선한 행위라도 그것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AC.9에서 사람은 아직 자신이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생기 없는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생기 없다는 말을 행위는 아무 가치도 없다거나 실제로는 악한 행위다라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분명히 선들이라고 부르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이라고 말합니다. 다만 아직 그 선의 참된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사람이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이어질 네 번째 상태와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AC.10에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AC.9의 세 번째 상태는 거듭남이 이미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그 과정 가운데 있는 상태입니다. 선이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아직 그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선들을 창1:11-12에 나오는 식물들로 표현합니다. ‘연한 ’, ‘ 맺는 채소’, 그리고 나중에는 가진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AC.9에서는 이 세 식물 각각의 세부적인 상응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연한 풀은 반드시 이것, 맺는 채소는 반드시 저것, 열매 맺는 나무는 다른 특정 상태라고 세밀하게 나누기보다, 이 식물들이 세 번째 상태에서 나타나는 선들을 표현한다는 사실을 우선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다만 그 순서 자체는 눈여겨볼 수 있습니다. 연한 풀에서 씨 맺는 채소로, 그리고 열매 맺는 나무로 표현이 이어집니다. 실제 창1 본문에서도 땅에서 식물이 돋아나고 씨를 맺으며 열매를 맺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자연적 창조의 모습을 사용하여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에서 선한 것들이 나타나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AC.9 한 단락만으로 그 각 식물에 세밀한 심리적 단계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람이 이 단계에서 실제로 행동한다는 사실입니다. AC.7에서는 첫 움직임이 주님의 자비였고, AC.8에서는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드러났습니다. AC.9에서는 사람이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사람 안에서 아무런 응답도 일어나지 않는 수동적인 과정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행동 가운데 아직 하나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선을 행한다고 느끼고, 그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는 인간의 행동을 부정하는 단계가 아니라, 그 행동의 생명과 근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아직 온전히 알지 못하는 단계입니다.

 

이 점 때문에 AC.9회개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회개했다고 해서 사람의 영적 인식이 한순간에 완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이전과 다른 말을 하고 선한 행위를 시작하면서도, 여전히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이러한 불완전한 상태를 지나 더 깊은 질서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내가 선을 행했으니 이것은 선이다라는 생각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므로 선한 행동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모두 AC.9의 질서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실제로 말하고 행합니다. 그러나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상태에서 점차 벗어나야 합니다. 그 다음의 거듭남 상태들이 바로 그 방향을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세 번째 상태의 선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생기 없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선들이라고 부릅니다. 거듭남의 질서 안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 단계를 건너뛰거나 무가치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AC.9에서 가장 중요한 대조는 선을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보다 선을 행하지만 그것을 누구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느냐에 있습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이미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행하지만, 아직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 선들은 아직 생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창1의 식물들이 넷째 날의 해와 달보다 먼저 등장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사람에게 선한 말과 행위가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아직 사랑과 신앙의 참된 생명이 어떻게 그 안에서 밝혀지는지는 다음 상태에서 더 분명해져야 합니다. AC.9은 그 직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세 번째 상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회개하여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하기 시작하지만, 선을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선에는 아직 참된 생명이 없다.이것이 AC.9이 말하는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입니다.

 

심화

1. 아직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데 회개의 상태인가?

 

AC.9, 심화 1, 아직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데 왜 ‘회개의 상태’인가?

AC.9.심화1. 아직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데 왜 ‘회개의 상태’인가? AC.9에서 세 번째 상태를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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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체어리티(charity) 무엇인가? : 한국어 단어로 번역하기 어려운가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 왜 한국어 한 단어로 번역하기 어려운가

AC.9.심화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 왜 한국어 한 단어로 번역하기 어려운가 AC.9에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영어 charity를 우리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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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창1 개요, '네 번째 상태'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것들을 행했으나,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겪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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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창1 개요, '두 번째 상태'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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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신앙의 지식들을 뜻하며, 그것들은 저장되어 있다가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 것들로부터 분리됩니다.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이때까지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으며,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보존되어 온 것입니다. The second state is when a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os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nd those which are proper to man.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and here are especially knowledges of faith, which have been learned from infancy, and which are stored up, and are not manifested until the man comes into this state. At the present day this state seldom exists without temptation, misfortune, or sorrow, by which the things of the body and the world, that is, such as are proper to man, are brought into quiescence, and as it were die. Thus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are separated from those which belong to the internal man. In the internal man are the remains, stored up by the Lord unto this time, and for this use.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state)를 첫 번째 상태와 분명히 구별합니다. 첫 상태가 전적으로 주님의 자비가 어둠 위에서 운행하는 준비 단계였다면, 두 번째 상태는 인간 안에서 ‘구별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단계’입니다. 이 구별이란 선과 악의 윤리적 분별 이전에, 무엇이 주님께 속한 것이고 무엇이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구별하는 인식의 시작을 뜻합니다. 이 구별 없이는 거듭남은 결코 진행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선과 진리로 착각하는 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라고 합니다. 리메인스는 사람이 살아오면서 스스로 축적한 종교 지식이나 도덕적 자산이 아니라, ‘주님이 유아기부터 사람 안에 조용히 저장해 두신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기초적 지식들, 선한 감정의 흔적들, 순수한 애정, 주님을 향한 어린 마음의 인상들이 포함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리메인스가 평소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그것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며, 오직 이 두 번째 상태에 이르러서야 그것들이 작동할 준비를 갖춥니다.

 

이 상태가 오늘날에는 거의 항상 시험, 불행, 슬픔과 함께 온다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유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주님이 고통을 기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지 않고서는 속 사람이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고유한 것,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욕망과 판단은 평소에는 매우 활발하여, 속 사람의 미세한 움직임을 완전히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섭리 안에서 외적 삶이 흔들리거나 제한되는 상황을 허용하시는데, 이로 인해 겉 사람의 활동은 약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조용해집니다.

 

이 과정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황폐(vastation)의 초기 형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의 것들이 약화되고 무력해질 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의 힘과 지혜에 의존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이때 속 사람 안에 저장되어 있던 리메인스가 깨어날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 겪는 슬픔이나 시험은 거듭남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입니다.

 

이 단락의 핵심 결과는 겉 사람과 속 사람의 분리입니다. 이는 인간이 둘로 쪼개진다는 뜻이 아니라, 내적 질서가 처음으로 형성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전에는 겉 사람의 사고와 욕망이 인간 전체를 지배했다면, 이제는 속 사람이라는 또 하나의 중심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속 사람 안에 바로 리메인스가 있으며, 그것들은 주님께서 오랫동안 이 시점을 위해 보존해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두 번째 상태는 주님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두신 것이 실제로 사용되기 시작하는 전환점입니다.

 

이 상태는 또한 인간의 신앙이 본격적으로 현실성을 갖기 시작하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이전까지 신앙이 있었다면 그것은 주로 외적 습관이나 전통, 혹은 지적 동의에 머물렀지만, 이제 신앙은 내면에서 삶과 연결될 가능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직 구별의 시작일 뿐입니다. 무엇이 주님께 속한 것인지, 무엇이 자기에게 고유한 것인지에 대한 이 구별은 이후의 모든 상태를 관통하는 기준이 됩니다.

 

결국 AC.8은 거듭남이 감정적 각성이나 도덕적 결심으로 진행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먼저 ‘구별의 눈이 열리는 사건’이며, 이 구별은 종종 고통과 침묵, 상실의 시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언제나 주님의 섭리가 있으며,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인간을 새롭게 하시려는 오랜 준비가 놓여 있습니다. 두 번째 상태는 그래서 고통의 단계이면서 동시에, 주님의 오랜 인내가 처음으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거룩한 전환의 단계입니다.

 

심화

1. 시험, 불행, 슬픔을 통해 사람의 것들이 잠잠해지는가?

 

AC.8, 심화 1, 왜 시험, 불행, 슬픔을 통해 겉 사람의 것들이 잠잠해지는가?

AC.8.심화1. 왜 시험, 불행, 슬픔을 통해 겉 사람의 것들이 잠잠해지는가? AC.8에는 조금 마음에 걸리는 문장이 나옵니다.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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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세 번째 상태'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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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 창1 개요, '첫 번째 상태'

AC.7 첫 번째 ‘상태’(state)는 앞서는(precede)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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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

번째 상태(state) 앞서는(precede)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번째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The first state is that which precedes, including both the state from infancy, and that immediately before regeneration. This is called avoid,” “emptiness,andthick darkness.And the first motion, which is the Lords mercy, is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AC.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1의 여섯 날을 사람의 거듭남에서 이어지는 여섯 상태라고 밝혔습니다. 이제 AC.7부터 그 상태들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첫 번째 상태는 빛이나 신앙이나 선한 행위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혼돈공허흑암으로 묘사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첫 번째 상태를 앞서는 상태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거듭남 바로 직전의 상태를 모두 포함시킵니다. 따라서 여기서 첫 번째 상태는 거듭남이 이미 진행되어 어느 정도 영적 성과가 나타난 단계를 뜻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에 앞서 있는 사람의 상태 전체를 먼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1의 첫 장면과 잘 맞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자연적 창조의 첫 장면이 아직 질서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하듯, 그 속뜻에서 사람의 거듭남 역시 처음부터 완성된 영적 질서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다만 AC.7은 아직 혼돈’, ‘공허’, ‘흑암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풀지 않습니다. 그것은 뒤에서 창1:2를 본격적으로 설명할 때 더욱 분명하게 밝혀집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 세 표현을 지나치게 세분하여 각각 어떤 특정한 영적 요소와 일대일로 대응시키기보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 이전의 첫 상태를 이 세 말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AC.7의 중심은 사실 이 어두운 상태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문장의 방향은 곧바로 번째 움직임으로 향합니다. 아직 사람에게 빛이 나타났다고 하지도 않았고, 사람이 회개했다고 하지도 않았으며, 신앙이나 사랑이 생겼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무엇인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주님의 자비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창1:2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가 바로 그 첫 번째 움직임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이것이 AC.7에서 가장 중요한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거듭남의 첫 움직임을 사람의 결심이나 지식이나 노력에서 찾지 않고 주님의 자비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아직 수면’, 물들의 얼굴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까지 앞당겨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AC.7 자체의 초점은 물의 상응을 자세히 밝히는 데 있지 않고,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묘사되는 상태 위에 주님의 자비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7은 거듭남의 출발점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이 먼저 자기 안에 영적 빛을 만들어 낸 뒤 주님께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첫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번째 움직임으로 다가오는 것이 주님의 자비입니다. 거듭남은 그 자비에서 시작됩니다.

 

그렇다고 이 한 문장만으로 거듭남에서 인간의 자유와 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결론 내릴 필요도 없습니다. AC.7은 아직 그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이후 거듭남의 상태가 진행되면서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시험을 겪고, 회개하며,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 앞서 AC.7이 먼저 밝혀 두는 것은 그 시작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첫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것은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가 함께 언급된 것과도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AC.7은 유아기부터 거듭남 직전까지를 첫 번째 상태 안에 포함시킵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유아기의 내적 구조나 유아에게 주어지는 선과 진리, 또는 리메인스의 형성과 보존에 관한 세부 교리를 모두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내용은 뒤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설명할 때 충분히 다룰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7을 읽으면서 우선 기억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람의 거듭남이 혼돈, 공허, 흑암으로 묘사되는 선행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상태 위에서 일어나는 번째 움직임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AC.7의 균형이 살아납니다. 사람의 처음 상태만 보면 어둡지만, 그 어둠이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이미 그 위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자비만 강조하면서 사람이 어떤 상태에서 시작하는지를 잊어버리면 거듭남이 왜 창조로 묘사되는지도 충분히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준비가 됩니다. AC.7에서는 아직 빛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 자신의 것이 구별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번째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그 움직임으로부터 거듭남의 다음 상태들이 차례로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AC.7은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 모든 거듭남의 근원을 아주 짧은 말로 밝혀 줍니다. ‘ 번째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입니다.1의 새 창조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AC.8, 창1 개요, '두 번째 상태'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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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 창1 개요, '전체 개요' (AC.6-15)

창1 개요 AC.6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인 여섯 ‘날’(days), 곧 여섯 ‘시기’(periods)는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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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인 여섯 (days), 여섯 시기(periods)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in general as follows.

 

해설

AC.6은 짧은 한 문장이지만, 이어지는 AC.7-13을 읽는 방향을 정해 주는 중요한 개요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의 여섯 을 사람의 거듭남에서 이어지는 여섯 상태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빛과 어둠, 궁창과 물, 땅과 식물,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와 짐승, 그리고 마침내 사람의 창조를 읽을 때에는 그 자연적 대상들이 속뜻에서 사람의 거듭남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주목할 말은 연속적 상태들(successive states)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날을 서로 무관한 여섯 가지 영적 주제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첫째 상태에서 둘째 상태로, 둘째에서 셋째로 이어지며 마침내 여섯째 상태에 이르는 하나의 연속된 거듭남의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앞으로 AC.7-13에서 각각의 상태를 살펴보면 앞의 상태에서 없던 것이 다음 상태에서 나타나고, 사람의 내적 생명이 점차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days)이라고 한 뒤 곧바로 시기(periods)라고 덧붙인 것도 중요합니다. 여기서 을 자연계의 24시간으로만 읽어서는 그가 설명하려는 속뜻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1의 날들은 속뜻에서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거쳐 가는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이 점은 뒤의 AC.23에서 이 상태를 의미한다는 설명과 함께 더욱 분명해집니다.

 

다만 이것을 그러므로 1 자연계의 창조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에서 스베덴보리가 지금 설명하려는 것은 창1에 담긴 속뜻입니다. 문자에는 천지와 빛과 물과 땅과 광명체와 생물과 사람의 창조가 기록되어 있지만, 그 문자 안의 속뜻에서는 사람의 거듭남, 곧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 펼쳐집니다.

 

이 때문에 창조거듭남은 이 장의 속뜻에서 깊이 연결됩니다. 거듭남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스스로를 조금 더 개선하는 정도의 일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여섯 상태를 보면 처음의 사람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서 출발하고, 그 가운데 빛이 나타나며,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하는 것들이 구별되고, 선과 진리가 생겨나고, 마침내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말하고 행하는 상태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질서가 속뜻에서는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열립니다.

 

여기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표현이 전반적으로(in general)입니다. AC.6은 여섯 상태의 세부 내용을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AC.7-13에서 각 상태를 하나씩 개괄하기에 앞서, 이 여섯 날 전체가 무엇을 다루는지를 먼저 알려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한 문장만 가지고 각 상태의 기간이나 개인별 진행 방식까지 자세히 추론하기보다, 우선 여섯 날은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 상태를 나타낸다는 기본 원리를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원리를 알고 나면 창1의 반복되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도 단순한 시간 표시와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뒤에서 저녁과 아침을 사람의 상태 변화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창1의 순서를 따라간다는 것은 자연계의 창조 순서를 따라가는 것인 동시에, 속뜻에서는 한 사람이 이전 상태에서 새로운 상태로 옮겨 가는 거듭남의 흐름을 따라가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여섯 상태를 인간이 스스로 밟아 올라가는 자기계발의 여섯 단계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 전체에서 생명과 빛과 선의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다가 점차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아 가는 것도 중요한 흐름이 됩니다. 따라서 창1의 거듭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사람이 받아들이면서 새롭게 되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존재로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AC.6 자체는 아직 인간의 자유와 거듭남에서의 참여 방식을 설명하는 글이 아니므로 여기에서 그 문제를 자세히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거듭남의 근원과 능력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과, 1의 여섯 날이 그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AC.6은 창1의 속뜻을 읽기 위한 첫 번째 안내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첫째 날에는 자연계에서 무엇이 만들어졌는가?라는 질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사람의 거듭남에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가?라는 질문도 함께 하게 됩니다. 그리고 AC.7부터 그 여섯 상태가 하나씩 펼쳐집니다.

 

첫째 상태는 거듭남 이전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 시작합니다. 둘째 상태에서는 주님에게 속한 것과 사람 자신의 것 사이의 구별이 시작됩니다. 셋째 상태에서는 회개 가운데 선한 일을 행하기 시작하지만 아직 그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넷째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불붙고, 다섯째 상태에서는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굳게 하며, 여섯째 상태에서는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으로부터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이 전체 흐름이 바로 AC.6이 말하는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입니다.

 

그러므로 창1의 여섯 날은 속뜻에서 여섯 개의 서로 떨어진 교훈이 아니라 하나의 거듭남이 진행되는 여섯 연속적 상태입니다. AC.6은 아직 그 상태들을 설명하지 않고 문을 열어 줄 뿐입니다. 이제 AC.7부터 그 첫째 상태가 무엇인지 살펴보게 됩니다.

 

 

 

AC.7, 창1 개요, '첫 번째 상태'

AC.7 첫 번째 ‘상태’(state)는 앞서는(precede)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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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서문, '이 모든 말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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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어떤 길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생명이 어떻게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는 이 흐름을 ‘인플럭스’(influx, 流入)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인플럭스란, 한마디로 말하면, 생명과 사랑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인간 안으로 들어오는 흐름을 뜻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기본 생각입니다.

 

이 흐름의 방향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으로, 그리고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흐릅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직접 연결되는 영적 차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생명은 먼저 이 속 사람에 닿습니다. 그다음, 이 생명이 겉 사람의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 우리의 생각과 의지, 곧 우리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생각과 의지가 육체의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이 구조를 하나의 그림처럼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마치 태양에서 빛과 열이 내려와 식물에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이 줄기와 잎을 통해 바깥으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태양이 없으면 식물은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태양의 빛은 먼저 식물의 내부 생명에 작용하고, 그다음 잎과 꽃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이 영적 태양이시며, 그 빛을 먼저 받는 자리가 바로 인간의 속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생각과 의지가 사실은 완전히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작용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 점을 설명할 때, ‘주님만이 생명 그 자체이시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인플럭스는 강제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은 항상 인간 안으로 흐르고 있지만,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흐름을 받아들여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중심적인 방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때문에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매우 중요해집니다. 속 사람이 열려 있으면 주님의 생명이 겉 사람으로 잘 흐릅니다. 그러면 사람의 생각과 행동도 점점 더 선과 진리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속 사람이 닫혀 있으면 그 흐름이 겉 사람으로 내려오지 못합니다. 그 경우 겉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에서 나온 생각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바로 이 구조 속에서 설명합니다. 거듭남은 겉 사람이 단순히 도덕적으로 조금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속 사람이 열리고, 그 속 사람을 통해 주님의 생명이 겉 사람으로 내려오는 과정입니다. 그 결과 겉 사람의 생각과 습관이 점점 변화됩니다. 그래서 그는 거듭남을 ‘속 사람이 새로워지고, 겉 사람이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면 인간 삶의 많은 현상이 설명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진리를 듣고 마음 깊이 감동을 받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같은 말을 들어도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속 사람의 상태에서 찾습니다. 속 사람이 열려 있으면 진리가 들어와 마음을 밝히지만, 속 사람이 닫혀 있으면 같은 진리도 단순한 지식으로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을 단순히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로 설명합니다.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속 사람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흐름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 모든 설명을 하나로 묶어 보면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는 매우 명확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그 생명은 속 사람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흐릅니다. 마지막으로 겉 사람을 통해 행동과 삶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자유는 이 흐름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있습니다.

 

이 지점을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여러 표현들이 훨씬 또렷하게 보입니다. 예를 들어 그가 ‘주님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신다’고 말할 때, 그것은 바로 속 사람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그 사랑에 따라 형성된다’는 말은 그 생명이 겉 사람을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질문해 오신 내용들을 하나로 연결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그림이 나타납니다.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고, 주님의 생명은 속 사람을 통해 인간 안으로 흐릅니다. 그리고 죽음은 이 구조 가운데 육체라는 바깥 도구가 벗겨지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생각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설명이 서로 연결된 하나의 구조 안에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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