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0을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장 가운데 하나가‘사람마다적어도두영과두천사가함께있다’는 말입니다.그러면 자연스럽게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두영은악한영을말하는가?’, ‘두천사는우리가흔히말하는수호천사인가?’, ‘거듭난사람에게는악한영들이없어지는가?’,그리고 무엇보다‘왜하필둘씩인가?’
AC.50자체에서는 이 모든 질문을 상세히 풀어 주지 않습니다.그러나‘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뒤쪽으로 가면 스베덴보리가 같은 문제를 다시 다루며 훨씬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따라서 이번 심화에서는AC.50이 직접 말하는 것과 뒤의AC에서 보충되는 내용을 구별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AC.50은‘모든사람에게적어도두영과두천사가있다’고 말합니다.그리고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소통하며,천사들을 통해 천국과 소통한다고 합니다.이어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악한영들이그와함께있다’고 하고,거듭난 상태에서는 천사들이 다스린다고 설명합니다.여기까지만 보아도AC.50의‘영들’은 천사들과 대비되어 영들의 세계와 사람을 연결하는 존재들이며,거듭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는 영들은 악한 영들로 묘사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AC.5848-5849에서 훨씬 명시적으로 다시 등장합니다.스베덴보리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천사들과 영들이 있으며, ‘천사들은천국에서,영들은지옥에서’온다고 말하고,모든 사람에게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다시 설명합니다.그리고 두 영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옥과 소통하게 하고,두 천사는 천국과 소통하게 한다고 합니다.따라서AC.50의‘두영’을 단순히 선악이 정해지지 않은 일반적인 영 둘이라고 이해하는 것보다는,뒤의 설명까지 함께 볼 때 지옥 쪽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영들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고‘사람옆에지옥에서올라온악한영둘과천국의천사둘이몸으로서서늘따라다닌다’는 식으로 자연계의 공간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스베덴보리가 말하는‘함께있음’은 영적 결합과 소통의 문제입니다.그가 실제 영계의 공간과 가까움에 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별도의 큰 주제이므로,AC.50의‘함께있다’를 자연계의 몇 미터 거리처럼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거듭난사람에게는악한영들이완전히없어지고천사들만남는가?’AC.50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2]에서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은 그 지배를 막는다고 하며, [3]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면 천사들이 다스린다고 합니다.즉AC.50이 직접 대비하는 것은‘천사와악한영의존재여부’라기보다 어느 쪽의 작용이 지배적인가 하는 상태의 차이입니다.그러나 이 문장만으로‘거듭난뒤에도정확히같은영들이같은방식으로계속머문다’거나‘악한영들은일정거리밖으로물러난다’는 세부까지 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왜둘인가?’라는 질문으로 가 보겠습니다.이것은AC.50에는 답이 없지만,뒤의AC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설명합니다.AC.5977-5978에서는 인간에게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이 있으며,천국에는 이에 대응하는 두 종류의 천사들이 있고 지옥에도 이에 반대되는 두 종류의 영들이 있기 때문에 둘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천사 가운데 한 종류는 사람의 의지에 속한 것들에 작용하고,다른 종류는 이해에 속한 것들에 작용합니다.의지에 작용하는 천사들은 사람의 사랑과 목적,따라서 선에 속한 것들과 관계되고,이해에 작용하는 천사들은 신앙과 원리,따라서 진리에 속한 것들과 관계됩니다.그는 앞의 천사들을 천적 천사,뒤의 천사들을 영적 천사라고 부릅니다.
지옥 쪽에도 이에 반대되는 두 종류가 있다고 설명합니다.한 종류는 의지에 속한 것들에 작용하고,다른 종류는 이해에 속한 것들에 작용합니다.따라서‘두영과두천사’라는 숫자는 단순히 네 명이라는 기이한 숫자 정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본 기능에 대응하는 영적 소통의 질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조심해야 합니다.그렇다고 사람 안의 모든 생각 하나에는‘이해담당천사한명’,모든 애정 하나에는‘의지담당천사한명’이 기계적으로 붙어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스베덴보리가 밝히는 것은 인간의 두 기본 기능과 천국·지옥의 두 종류 사이의 상응 관계입니다.이것을 현대적인 조직도나 신경회로처럼 지나치게 세밀한 기계 구조로 바꾸면 오히려 그의 설명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또‘두천사와두영이있으므로내마음속에서좋은생각하나와나쁜생각하나가항상동시에들려온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AC.50과 뒤의 관련 글들은 인간이 천국과 지옥 양쪽과 소통한다는 큰 구조를 설명하지만,개별적인 생각과 느낌 하나하나를 우리가 어느 영의 직접 발언으로 판별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오히려 그런 식의 영적 존재 판별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 점은 인간의 책임 문제에서도 중요합니다. ‘악한생각은악한영에게서왔으니내것이아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악을 남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유입되는가만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AC.50에서는 그 자유의 전체 메커니즘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더 자세히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최소한‘영들이영향을주므로인간에게책임이없다’는 결론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면 두 천사와 두 영은 각각 독립적으로 자기 힘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존재일까요?이것 역시AC.50이 단호하게 막습니다.천사들은‘사역자들’일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입니다.천사들도 자기들에게 어떤 능력도 없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으로 일한다고 고백한다고 합니다.지옥 쪽의 영들이 작용하는 경우에도 인간의 존재와 생명 전체가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AC.50의‘두영과두천사’를 읽는 중심은 신비한 호위 존재 넷에 대한 호기심이 아닙니다.인간이 스스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생명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이라는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 역시 그 영적 질서 안에서 작용하며,그 모든 것 위에서 주님 한 분이 섭리 가운데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고 거듭남을 이루신다는 것이 더 중요한 핵심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AC.50은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말하며,뒤의AC.5848-5849는 두 영을 지옥과의 소통,두 천사를 천국과의 소통과 연결합니다.그리고AC.5977-5978은 그들이 왜 둘씩인지에 대해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에 각각 대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그러므로‘두영과두천사’는 임의적인 숫자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그리고 천국과 지옥과의 영적 소통이라는 더 큰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3, ‘만 입이 내게 있으면’, 찬68, ‘오 하나님 우리의 창조주시니’입니다.
오늘은창1 여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24절로 26절, AC 글 번호로는 46번에서 50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4-26)
이 본문을
사람을 향한 창조, 형상으로 나아가는 여섯째 날
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 시작합니다.
주일예배라는 특별한 사정으로 다 다루지 못한 부분들도 돌아가셔서 꼭 몇 번씩 정독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신앙 반석, 그 주춧돌이 깊이, 그리고 아주 견고하게 놓아져 가는 느낌을 받게 되실 겁니다. 오늘 설교 원고 중에 수많은 보석 같은 비밀들이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거듭남’이며, 놀라운 사실은 이 수십 장 원고가 정말 다양한 각도로 이 거듭남을 비추고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이 AC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의 시간은 그 순간순간이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순도 100%의 설교이며, 우리의 눈, 특히 심령을 맑고 밝게 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AC.50
태고교회는‘주의형상’(imageoftheLord)이라는말로표현할수있는것보다훨씬더많은것을이해하고있었습니다.사람은자신이천사들과영들에의해주님의다스림을받고있다는사실을전혀알지못하고있는데,그러나실제로는사람마다적어도두영과두천사가함께있다는사실입니다.영들을통해사람은영계와소통하고,천사들을통해서는천국과소통하는것이지요.영계를통한소통과,천국을통한소통,그리고그천국을통해주님과연결되지않는다면,사람은전혀살수없는구조입니다.사람의생명은이결합에전적으로달려있어서,만일영들과천사들이물러난다면그는즉시사라지고말것입니다.그러니까존재자체를유지할수가없게된다는말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understood by the “imageoftheLord” more than can be expressed.Man is altogether ignorant that he is governed of the Lord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that with everyone there are at least two spirits, and two angels.By spirits ma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angels with heaven.Without communication by means of spirits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means of angels with heaven, and thus through heaven with the Lord, man could not live at all; his life entirely depends on this conjunction, so that if the spirits and angels were to withdraw, he would instantly perish.
[2] 사람은거듭나기전과후에있어다스림을받는방식이전혀다릅니다.거듭나지않은상태에서는악한영들이사람과함께있으며,그들이사람을강하게지배합니다.이때에도여전히천사들은함께있으나거의아무것도하지못하고,다만사람이가장극단적인악으로떨어지지만않도록막아주며,실제로그의욕정을통해어떤선으로굽히고,감각의오류를통해진리로굽힐뿐입니다.이때사람은함께있는영들을통해영계와는소통하지만,악한영들이지배하고천사들이그지배를겨우막고있는상태이므로,천국과의소통은매우미약합니다. While man is unregenerate he is governed quite otherwise than when regenerated.While unregenerate there are evil spirits with him, who so domineer over him that the angels, though present, are scarcely able to do anything more than merely guide him so that he may not plunge into the lowest evil, and bend him to some good—in fact bend him to good by means of his own cupidities, and to truth by means of the fallacies of the senses. He the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through the spirits who are with him, but not so much with heaven, because evil spirits rule, and the angels only avert their rule.
[3] 그러나사람이거듭나면상황이완전히달라집니다.이제는천사들이주도적으로다스리며,사람에게모든선과진리를불어넣고,악과거짓에대해서는두려움과혐오를일으키게합니다.물론천사들이이끌기는하지만,그것은봉사의방식일뿐이며,실제로사람을다스리는분은오직주님한분뿐입니다.주님께서는천사들과영들의사역을통해사람을다스리십니다.이러한이유로여기에서는먼저복수형으로‘우리의형상대로사람을만들자’(Letusmakemaninourimage)라고하고,곧이어단수형으로‘하나님이자기형상대로그를창조하셨다’(Godcreatedhiminhisownimage)라고합니다.이것은주님께서천사들의사역을통해일하시지만,다스림과창조의주체는오직주님한분뿐이라는사실을드러냅니다.주님께서도이점을이사야에서분명히밝히십니다. But when the man is regenerate, the angels rule, and inspire him with all goods and truths, and with fear and horror of evils and falsities.The angels indeed lead, but only as ministers, for it is the Lord alone who governs man through angels and spirits.And as this is done through the ministry of angels, it is here first said, in the plural number, “Letusmakemaninourimage”; and yet because the Lord alone governs and disposes, it is said in the following verse, in the singular number, “Godcreatedhiminhisownimage.”This the Lord also plainly declares in Isaiah:
천사들자신도자신들에게는어떤능력도없으며,오직주님한테서나오는그분의힘으로만자기들은일한다고고백합니다. The angels moreover themselves confess that there is no power in them, but that they act from the Lord alone.
해설
AC.50은 바로 앞의 AC.49에서 시작된 ‘하나님의형상’이라는 주제를 뜻밖의 방향으로 깊게 들어갑니다. AC.49에서는 최고의 뜻에서 참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 안에서도 주님에게서 온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이 참으로 ‘사람의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50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주의형상’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이해했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인간의 생명과 영계·천국의 연결,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다스리시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합니다.
첫 문장부터 현대 독자에게는 매우 낯선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은 자신이 주님에 의해 천사들과 영들을 통하여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며,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고 합니다.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소통하고, 천사들을 통해 천국과 소통하며, 그리하여 천국을 통해 주님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결합이 없으면 사람은 전혀 살 수 없으며, 영들과 천사들이 물러나면 즉시 소멸할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천사들과영들이사람에게생명을준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AC.50의 문장 자체가 연결의 최종점을 ‘주님’에게 둡니다. 사람은 영들의 세계 및 천국과 연결되어 있고 ‘그리하여천국을통해주님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천사나 영이 생명의 독립적인 근원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이 주님과의 결합에 의존한다는 것이 중심입니다. 앞의 AC.39-43에서도 이미 모든 참된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점이 반복해서 설명되었습니다.
‘사람마다적어도두영과두천사가함께있다’는 말 역시 처음 접하면 여러 질문을 낳습니다. ‘그렇다면내옆에네명의보이지않는존재가늘따라다닌다는뜻인가?’, ‘두영은모두악한영인가?’, ‘왜하필둘씩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AC.50자체는 그 모든 세부를 여기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후 AC.5848-5849에서도 사람에게 두 영과 두 천사가 있어 각각 지옥과 천국과의 소통을 이루게 한다고 다시 말하며, AC.5977-5978에서는 왜 둘씩인지를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 및 이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의 두 종류와 연결하여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 문제는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겠습니다.
AC.50의 직접적인 관심은 숫자 자체보다 사람의 상태에 따라 이 영적 다스림의 양상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거듭나기전과거듭난뒤전혀다르게다스림을받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부터 [2]와 [3]이 서로 대조됩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이 사람과 함께 있으며 그들이 강하게 지배한다고 합니다. 천사들도 여전히 함께 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가장 낮은 악으로 빠지지 않도록 돌이키고, 그를 어떤 선과 진리 쪽으로 굽히는 정도라고 설명합니다. 이때 사람은 함께 있는 영들을 통해 영들의 세계와는 소통하지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은 그 지배를 막고 있기 때문에 천국과의 소통은 그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특히 눈에 띄는 문장이 있습니다. 천사들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그의욕정을통해어떤선으로’, ‘감각의오류를통해진리로’ 굽힌다고 합니다. 이것을 ‘욕정과감각의오류가사실은좋은것’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50이 말하는 것은 사람이 아직 거듭나지 않은 현재 상태에 있을 때 천사들이 그 사람에게 없는 높은 상태를 억지로 전제하여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처해 있는 상태 안에서 극단적인 악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며 어떤 선과 진리 쪽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욕정을선한에너지로바꾸면된다’는 일반적인 거듭남 방법론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또 ‘악한영들이지배한다’는 말을 사람에게 아무런 자유나 책임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내악한생각과행동은사실악한영들이한것이니나는책임이없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AC.50은 제공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천국·지옥 사이의 평형, 그리고 유입된 것을 사람이 어떻게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가는 스베덴보리가 다른 곳에서 훨씬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AC.50은 지금 그 전체 메커니즘을 설명하려는 글이 아니라 거듭나기 전과 후에 주님의 다스림이 사람에게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3]에서는 상황이 바뀝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천사들이 다스리고, 사람에게 모든 선과 진리를 불어넣으며 악과 거짓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혐오를 일으키게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천사가선과진리를만들어주는존재’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다음 문장에서 천사들이 인도하기는 하지만 오직 ‘사역자들’로서 그렇게 할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이 한 문장이 AC.50전체를 읽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앞에서는 영과 천사들의 작용을 매우 강하게 말하지만, 그들을 독립된 주체로 세우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사역자이고, 주님께서 천사들과 영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하나님과사람사이에수많은중간존재가있어서하나님은간접적으로만사람에게접근하신다’는 구조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강조점은 오히려 그 모든 사역 가운데 실제로 다스리고 배열하시는 분은 주님 한 분뿐이라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창1:26의 매우 유명한 질문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형상대로내가사람을만들자’가 아니라 ‘우리의형상을따라우리의모양대로우리가사람을만들자’라고 복수형으로 말씀하실까요? AC.50은 이에 대해 아주 분명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주님께서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먼저 복수형으로 ‘우리의형상대로사람을만들자’고 한 것이며, 그러나 실제로 다스리고 배열하시는 분은 주님 한 분뿐이기 때문에 바로 다음 절에서는 단수형으로 ‘하나님이자기형상대로사람을창조하셨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AC.50에서 스베덴보리가 창1:26의 ‘우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여기서 ‘우리’를 여러 신들의 회의로 보지 않고, 주님과 그분을 섬기는 천사들의 사역이라는 관계 속에서 읽습니다. 그러나 창조와 거듭남의 실제 주체는 천사들이 아니라 주님 한 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사44:24을 인용합니다. ‘나는만물을지은여호와라홀로하늘을폈으며나와함께한자없이땅을펼쳤고.’ 이 구절을 가져오는 직접 목적은 매우 분명합니다. ‘우리’라는 복수형이 천사들도 창조의 공동 주체라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홀로 만물을 지으셨으며, 스베덴보리도 이어서 ‘주님만이다스리고배열하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44:24의 하늘과 땅 각각의 세부 속뜻을 여기서 추가로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인용은 무엇보다 ‘주님홀로’라는 논증을 뒷받침합니다.
마지막 문장도 같은 균형을 확인합니다. 천사들 자신도 자기들에게는 아무 능력이 없으며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힘으로만 일한다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AC.50은 천사들의 역할을 매우 크게 말하면서도 동시에 천사들에게 어떤 독립된 능력도 돌리지 않습니다. 사람은 천사와 영들을 통해 영계와 천국에 연결되어 있지만, 생명의 근원도, 다스림의 근원도, 창조와 거듭남의 주체도 주님 한 분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하나님의형상’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현재 해설처럼 ‘하나님의형상=주님의통치가막힘없이흐르는상태’라고 하나의 공식으로 정의하기보다 AC.50이 말하는 만큼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주의형상’이라는 말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것을 이해했다고 한 뒤, 그들이 알고 있던 인간의 영적 연결과 주님의 다스림을 하나의 예로 펼쳐 보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에게서는 천사들이 사역하고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창1:26의 ‘우리의형상대로’와 연결합니다.
따라서 AC.50은 ‘하나님의형상’이 단순히 사람의 외모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동시에 이것을 단순히 인간의 도덕적 성품 몇 가지로도 축소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참된 영적 생명 전체가 주님에게 의존하고, 주님께서 천국과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며 거듭나게 하신다는 더 큰 질서 안에서 ‘형상’을 바라봅니다. 다만 형상과 모양의 더 정확한 구별은 다음 AC.51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므로, 그 설명까지 여기서 미리 당겨 올 필요는 없습니다.
AC.50을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천사와 영들에 관한 설명이 가장 눈에 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이 정말 강조하는 것은 ‘네명의보이지않는존재가사람곁에있다’는 신기한 정보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기에게서 독립적으로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며, 그의 생명은 궁극적으로 주님과의 결합에 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천사들과 영들의 모든 사역 배후에서 실제로 다스리고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수형 ‘우리’ 뒤에 곧바로 단수형 ‘하나님이자기형상대로창조하셨다’가 이어집니다. 많은 사역자가 있어도 창조와 거듭남의 주체는 한 분이십니다.
AC.49첫머리에는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뒤 곧바로‘이에대해서는드릴말씀이많지만,아직은때가아닙니다’라고 합니다.무엇을 그렇게 많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며,왜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는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우리가 대신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AC.49는‘아직은때가아니다’라고 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따라서‘독자들이감당할수없기때문’, ‘신비주의에빠질위험이있기때문’, ‘섭리적으로감추어두셨기때문’이라고 이유를 확정한다면 그것은AC.49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우리의 추론이 됩니다.
이 문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첫째,스베덴보리에게는‘태고교회사람들과주님께서얼굴과얼굴을마주하여말씀을나누셨고주님께서사람으로나타나셨다’는 문제에 관하여 여기 기록한 것보다 훨씬 더 말할 내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둘째,그는 그것을AC.49에서는 아직 자세히 다루지 않기로 의도적으로 유보했다는 것입니다.이 두 가지 이상을 이 한 문장만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문장이 아무 의미 없는 편집상의 메모라는 뜻도 아닙니다.오히려AC를 읽을 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을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설명하지 않습니다.지금 설명하려는 본문의 중심에 필요한 만큼 말하고,다른 주제는 뒤로 남겨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AC.49의 중심은 태고교회의 현현 방식 자체를 상세히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왜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사람’이라고 불렀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문장의 흐름을 보면 이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사람으로나타나셨다’고 한 직후‘이러한이유로그들은주님외에는누구도사람이라고부르지않았다’고 이어집니다.따라서AC.49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태고교회와 주님의 교통에 관한 모든 세부가 아니라, ‘주님께서사람으로나타나셨다’는 사실과 그것이 태고교회의‘사람’이해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얼굴과얼굴을마주하여’라는 말을 우리가 익숙한 자연계의 대화 장면처럼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AC.49는 주님께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분명히 말하지만,그 현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각되었는지,모든 태고교회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했는지,얼마나 자주 그러했는지는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따라서‘영적눈으로보았다’, ‘내적시야가열렸다’와 같은 세부를AC.49의 설명인 것처럼 덧붙이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을 스베덴보리 자신의 영계 경험과 곧바로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 여러 곳에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 및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그것만으로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의‘얼굴과얼굴’교통이 정확히 같은 방식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서로 관련하여 연구할 수 있는 주제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면‘아직은때가아니다’라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가장 안전한 답은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주제에는더말할것이많이있지만,지금이자리에서는그것을다루지않겠다.’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는 그가 직접 밝히지 않았으므로 열린 채로 두는 것입니다.이것은 모르는 것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는 독법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 유보가AC.49의 중심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놀라운 영적 경험 자체에 독자의 관심을 붙잡아 두려 하지 않습니다.그것을 짧게 언급하고 곧바로 더 중요한 문제,곧‘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로 돌아갑니다.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오직 주님만을‘사람’이라고 불렀고,자기 안에서도 주님에게서 온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사람의것’이라고 했습니다.AC.49에서 지금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AC를 읽을 때에도 좋은 원칙이 됩니다.스베덴보리가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먼저 완성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흥미로운 한 문장을 만났다고 해서 관련 교리를 모두 끌어와 그 빈칸을 채우기보다, ‘지금이글이말하는만큼’을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다음 설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그렇게 읽으면AC의 긴 흐름 속에서 어떤 주제가 처음에는 짧게 언급되고 이후 점차 자세해지는 과정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드릴말씀이많지만,아직은때가아닙니다’는 신비한 비밀을 암시하므로 우리가 그 내용을 추측해야 한다는 초대가 아닙니다.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스베덴보리 자신이 지금은 여기까지만 말하겠다고 경계를 그은 문장입니다.그 경계를 존중하면서AC.49가 지금 밝히는 핵심,곧 주님이 최고의 뜻에서 유일한‘사람’이시며 인간 안의 참된 사람됨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있다는 데 집중하는 것이 이 문장을 가장 안전하게 읽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창1:26)
AC.49
태고교회,곧그교회의사람들과주님께서는얼굴과얼굴을마주하여말씀을나누셨는데,그때주님은사람의모습으로나타나셨습니다.이에대해서는드릴말씀이많지만,아직은때가아닙니다.이러한이유로,태고교회사람들은주님외에는누구도‘사람’(man)이라는호칭으로부르지않았습니다.그들은주님에게서나온것들만을‘사람’(men)이라고했고,자기자신을그호칭으로부르는일은하지않았습니다.오직자기안에서인식된것들,곧주님에게서왔다고퍼셉션된모든사랑의선과신앙의진리만을‘사람의것’(ofman)이라했습니다.그것들은주님에게서나왔기때문입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These they said were “of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 이로부터예언서들에서‘사람’(man)과‘인자’(thesonofman)는최고의뜻으로는주님을뜻하고,속뜻으로는지혜와총명을뜻하며,따라서거듭난모든사람을뜻하게됩니다.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of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As in Jeremiah:
이사야에서‘사람’(man)은속뜻으로는거듭난사람을,최고의뜻으로는유일한사람으로서의주님을뜻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다니엘에게나타나셨을때에는‘인자’(thesonofman),곧사람이라일컬음을받으셨습니다.이는같은뜻입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of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4] 주님께서는복음서에서도자신을자주‘인자’(thesonofman),곧사람이라하시며,다니엘에서와같이영광가운데오실것을예고하셨습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of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여기‘하늘구름’(Thecloudsofheaven)은말씀의문자적의미를뜻하고,‘능력과큰영광’(powerandgreatglory)은말씀의속뜻을뜻합니다.이속뜻은전체적으로나부분적으로나오직주님과그분의나라만을가리키며,바로여기서속뜻의능력과영광이나옵니다. The “cloudsof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andgreat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해설
AC.49는 창1:26의 ‘우리가사람을만들고’에서 이제 ‘사람’이라는 말 자체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앞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에 이른 사람이 ‘영적인간’이며 ‘하나님의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를 ‘사람’이라고 하며, 더 근본적으로 말씀의 속뜻에서 ‘사람’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AC.49의 대답은 매우 강렬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으며, 자기들 자신조차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당황스러운 말입니다. ‘그러면인간은사람이아니라는뜻인가?’ 그러나 AC.49가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이나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과 태고교회의 영적 인식에서 ‘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켰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참된 사람됨의 근원은 인간 자신의 proprium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자기 안에서 ‘사람의것’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AC.49는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사랑의모든선’과 ‘신앙의모든진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단순히 사람이 선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들이 ‘주님에게서왔다고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람의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것들은주님에게서나왔기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9-48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한다고 했고, AC.41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에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9에서는 같은 원리가 ‘사람됨’에 적용됩니다.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그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가리키며, 속뜻에서는 주님에게서 지혜와 총명을 받아 거듭난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만이참사람’이라는 말을 인간을 낮추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참된 사람됨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와 생명을 만들어 내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참된 지혜와 총명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갑니다. 따라서 이 말의 초점은 ‘누가인간자격이있는가?’를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의참된영적생명의근원이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49의 첫 문장에는 또 하나 매우 놀라운 내용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얼굴을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에 대해 ‘많이말할수있지만아직은때가아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상상하여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AC.49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것과, 바로 이것이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와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짧은 유보 문장은 자연스럽게 궁금증을 일으키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다음부터 스베덴보리는 예언서에서 ‘사람’과 ‘인자’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사람’과 ‘인자’는 ‘최고의뜻’에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에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모든 성경 인용을 읽는 열쇠입니다.
렘4:23,25에서 예레미야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 빛이 없고 ‘사람이없다’고 말합니다. AC.49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사람’이라는 말이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앞에서 ‘사람’의 속뜻을 지혜와 총명, 따라서 거듭난 사람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사람이없다’는 표현 역시 그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함께 나오는 ‘공중의새가다날아갔다’는 표현도 앞의 AC.40에서 새가 이성적·지적인 것들과 관계된다고 설명한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AC.49는 여기서 예레미야 전체의 황폐 상태를 단계별로 해설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을 세밀하게 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45:11-12에서는 여호와께서 ‘내가땅을만들고그위에사람을창조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도 속뜻의 ‘사람’을 거듭난 사람으로, 최고의 뜻의 ‘사람’을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과 연결합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자연계 인간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의 ‘사람’이라는 표현에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겔1:26은 주님께서 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를 보여 주는 직접적인 예로 인용됩니다. 에스겔은 보좌 위에 ‘사람의모양같은’ 형상을 봅니다. AC.49는 이 환상의 보좌나 남보석 등의 세부 상응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단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태고교회사람들에게주님께서사람으로나타나셨다’고 한 것이 예언자들의 환상에서도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최고의 뜻에서 ‘사람’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논증에 사용됩니다.
단7:13-14에서는 그 표현이 ‘인자’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니엘에게 보이신 분이 ‘인자’, 곧 ‘사람’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같은 뜻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인자의 왕국과 권세에 관한 모든 세부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자’라는 호칭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인용의 직접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복음서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자주 ‘인자’라고 부르셨으며, 마24:30에서는 다니엘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AC.49는 ‘사람’이라는 주제와 함께 말씀의 문자 의미와 속뜻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짧게 엽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늘구름’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큰영광’이 말씀의 속뜻을 뜻한다고 직접 밝힙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설명합니다. 말씀의 속뜻은 ‘전체적으로나부분적으로나오직주님과그분의나라만을가리키기’ 때문이며, 바로 거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AC.49가 직접 말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론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속뜻을깨닫는순간곧인자의재림이일어난다’는 식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이 확실히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전체적으로나부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심리나 도덕적 교훈을 흥미롭게 찾아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은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사람’ 역시 결국 인간 자신에게서 설명이 완성되지 않고, 최고의 뜻에서는 주님에게까지 올라갑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형상의 원형이신 주님을 보아야 한다는 방향이 여기서 열립니다.
이 점에서 AC.49는 앞의 AC.48과 다음 글들을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다리입니다.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의 영적 인간이 ‘하나님의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49는 곧바로 인간 자체를 바라보지 않고 먼저 주님을 바라봅니다.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 안에서 참으로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도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위대함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하는 사람됨과 관계됩니다.
동시에 여기서 ‘거듭난사람만사람이고다른사람은사람이아니다’라는 식의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AC.49는 사람의 사회적 가치나 존엄을 분류하는 글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이 최고의 뜻과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글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스베덴보리의 매우 깊은 인간론을 오히려 사람을 차별하는 주장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결국 AC.49가 말하는 ‘사람’의 비밀은 생명의 근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 안의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자기 소유라고 여기지 않고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을 ‘사람’이라 불렀고, 주님에게서 온 것들만을 ‘사람의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서의 ‘사람’과 ‘인자’, 에스겔과 다니엘의 사람 형상, 복음서의 인자, 그리고 말씀의 구름과 영광까지 이어지는 모든 인용은 결국 이 중심을 향합니다. 최고의 뜻에서 참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의 참된 지혜와 총명과 사람됨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생깁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 25)
AC.48
이로부터사람이거듭남의다섯번째상태에있을때가분명해집니다.이때사람은이해에속한신앙의원리로말하며,그로써진리와선안에서자신을확증합니다.그가이때내놓는것들은생명이있는것들이며,그것들을가리켜‘바다의물고기’(fishesofthesea), ‘하늘의새’(fowloftheheavens)라합니다.사람이여섯번째상태에이르면,이해에속한신앙과,거기에서나온의지에속한사랑으로진리들을말하고선한일들을행합니다.그가이때내놓는것을‘생물’(livingsoul), ‘가축’(beast)이라합니다.그리고이때그는신앙으로뿐만아니라사랑으로도행동하기시작하므로, ‘하나님의형상’(imageofGod)이라하는영적인간이됩니다.이것이지금여기서다루는주제입니다. Hence then it appears that man is in the fifth state of regeneration when he speaks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he true and in the good.The things then brought forth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esofthesea,” and the “fowloftheheavens.”He is in the sixth state, when 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he speaks truths, and does goods; what he then brings forth being called the “livingsoul,” and the “beast.”And as he then begins to act from love, as well as from faith,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ofGod,” which is the subject now treated of.
해설
AC.48은 지금까지 이어진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차이를 짧고 분명하게 정리하는 글입니다. 특히 ‘다섯번째상태와여섯번째상태가실제로무엇이다른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합니다. 앞에서는 물고기와 새, 생물과 짐승이라는 각각의 상응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한 사람의 거듭남 과정 안에 놓고 두 상태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먼저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이해에속한신앙의원리로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이해에 속합니다. 사람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신앙으로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을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합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이미 ‘생명이있는것들’입니다. 그래서 다섯째 날의 ‘바다의물고기’와 ‘하늘의새’로 표현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섯 번째 상태를 아직 영적으로 살아 있지 않은 상태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48은 이때 산출되는 것들을 분명히 ‘animate’, 곧 생명이 있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앞의 AC.39에서도 큰 광명체들이 켜진 뒤 사람이 비로소 살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섯 번째 상태에 와서 처음으로 영적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있지만, 그 생명이 나타나는 중심이 아직 주로 이해에 속한 신앙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무엇이 달라질까요?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이해에속한신앙으로부터,그리고거기에서나온의지에속한사랑으로부터진리를말하고선을행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세밀한 변화가 있습니다. 신앙이 사라지고 사랑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도 신앙은 그대로 있으며, 거기에 그 신앙에서 나온 사랑이 의지에 속한 것으로 함께합니다.
그래서 다섯째 상태와 여섯째 상태의 차이를 단순히 ‘아는단계와행하는단계’라고만 나누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상태의 사람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AC.48이 직접 대비하는 것은 그보다 더 내적인 것입니다. 다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에서 말하며 그로써 자신을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처음 읽으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다섯째상태에는사랑이전혀없고여섯째상태에서갑자기사랑이생긴다는뜻인가?’ 그렇게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48은 거듭남 전체에서 사랑이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섯째 상태에서 사람이 ‘사랑으로도행동하기시작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이 글의 초점은 사랑의 최초 존재 여부를 따지는 데 있지 않고, 신앙과 함께 사랑이 실제 의지에 속한 원리로서 행동의 근원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기존 해설에서처럼 이를 ‘처음에는옳으니까해야한다고애쓰다가나중에는좋아서자연스럽게한다’는 예로 설명하면 어느 정도 감을 잡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AC.48의 정확한 정의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 상태에 반드시 심한 억지와 갈등이 있고, 여섯째 상태에 이르면 모든 선행이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AC.48이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과 갈등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AC.48에서 우리가 확실히 붙들 수 있는 것은 ‘행동의근원’에 관한 변화입니다. 다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이 전면에 나타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그 신앙과 더불어,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가이제신앙으로부터뿐아니라사랑으로부터도행동하기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뿐아니라’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신앙을 버리고 사랑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삶의 원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때 산출되는 것들이 창1:24-25의 ‘생물’과 ‘짐승’으로 표현됩니다. 앞의 AC.44-46에서 이미 이 짐승들이 의지에 속한 것들, 특히 애정과 관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다섯째 날의 물고기와 새에서 여섯째 날의 생물과 짐승으로 넘어가는 것은 단순히 피조물의 종류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 이해에 속한 신앙의 상태에서 의지에 속한 사랑까지 포함하는 상태로 깊어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영적인간’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형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AC.48의 절정입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형상’을 우리가 임의로 ‘하나님과작동방식이같아지는것’이라고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8자체가 그 이유를 간단히 제시합니다.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부터뿐아니라사랑으로부터도행동하기시작하기’ 때문에 영적 인간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형상’이라고 해서 사람이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앞의 여러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고 반복하여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자기에게서 신적인 생명을 만들어 내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과 사랑이 그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져 삶으로 나타나는 상태와 연결하여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AC.47과의 연결도 중요합니다. 바로 앞에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마치자기에게서인듯’ 산출하며,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8에서는 그 진행 가운데 여섯째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에 속한 신앙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나온 사랑이 의지에 속하게 되고, 사람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용어상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AC.48은 이 사람을 ‘영적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앞으로 AC를 읽다 보면 ‘영적’과 ‘천적’이 서로 구별되는 더 세밀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영적인간’이라는 말을 보고 곧바로 이후의 모든 영적·천적 구별을 이 한 문장에 끌어와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여섯째 상태에 이른 거듭난 사람을 ‘영적인간’, ‘하나님의형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 창1:26이하에서 ‘형상’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이어집니다.
AC.48은 결국 다섯째 상태를 낮추고 여섯째 상태만 참된 것으로 만드는 글이 아닙니다. 다섯째 상태도 이미 살아 있는 거듭남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이해가 진리를 알고 신앙으로 확증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그 신앙에서 사랑이 의지에 속한 것으로 나타나고, 사람은 신앙뿐 아니라 사랑에서도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그는 ‘영적인간’, 곧 ‘하나님의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이 글의 흐름을 ‘신앙에서사랑으로’라고만 표현하기보다는 ‘신앙과사랑이함께삶이되는데로’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다섯째 날에 살아난 이해에 속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섯째 날에는 의지에 속한 사랑과 함께 하나의 더 온전한 삶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창조의 다섯째 상태와 여섯째 상태 사이에서 AC.48이 보여 주는 중요한 전환입니다.
AC.29두 번째 단락에,‘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being his state of repentance,’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좀 어리둥절합니다.갑자기repentance가 나오기 때문인데...이게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건가요?
AC.29을 읽다 보면 마지막에 갑자기 등장하는 ‘회개(repentance)의상태’라는 표현이 조금 뜻밖으로 느껴집니다. 앞에서는 ‘연한풀’, ‘씨맺는채소’, ‘씨가진열매맺는나무’가 차례로 나오는 식물의 성장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스베덴보리는 이 셋째 단계를 가리켜 ‘인간거듭남의세번째연속단계이며, 그의회개의상태’라고 말합니다. 왜 식물이 자라는 단계가 곧 ‘회개’일까요?
이 질문을 풀려면 먼저 창1의 앞선 두 날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첫째 날에는 사람이 자기 안의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처음 알기 시작합니다. 둘째 날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구별이 생기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모여 거듭남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셋째 날에 이르면 마침내 그 준비된 ‘땅’에서 무엇인가 실제로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즉 진리가 단지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람의 삶에서 어떤 결과를 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회개’라는 말이 연결됩니다. 회개는 단지 잘못을 슬퍼하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비추어 자신의 삶이 잘못되어 있음을 보며, 실제로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가 단순한 지식에서 끝나지 않고 삶을 바꾸기 시작할 때 회개가 실제로 나타납니다.
셋째 날의 식물들은 바로 이런 변화를 보여 줍니다. ‘연한풀’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이 사람 안에서 처음 돋아나는 매우 연약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씨맺는채소’는 그보다 더 유용한 것이 나타나는 상태이며, ‘씨가진열매맺는나무’는 마침내 실제 열매가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 표현을 지나치게 세밀한 심리 단계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주님에게서오는선과진리가사람안에서처음실제결과를내기시작한다’는 흐름을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을 통하여 ‘남을미워하는것은옳지않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고 해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단지 기억 속의 지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자신이 특정 사람을 오래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리의 빛 속에서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는이미움을그대로두어서는안되겠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험담을 줄이고, 보복하려는 마음을 억제하며, 상대를 조금이라도 공정하게 대하려고 애쓰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때 진리는 단순한 지식에서 실제 삶의 변화로 넘어갑니다. 이런 움직임이 ‘회개의상태’입니다.
그러므로 AC.29에서 repentance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설명한 ‘식물이돋아나는것’이 바로 회개의 영적 모습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스베덴보리가 그 단계 전체를 ‘회개의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땅이 드러나고 씨앗을 받을 준비가 되었으며, 이제 그 씨앗에서 실제 싹과 열매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사람 역시 진리를 배우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진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AC.29의 회개는 아직 거듭남의 완성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지만, 아직 사람은 그것을 참으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셋째 날의 식물들은 열매까지 맺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생명없는것들’로 불립니다. 이 회개는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중요한 준비 단계입니다.
이 점은 회개와 거듭남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회개는 거듭남과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거듭남의 실제 과정 안에 있습니다. 사람이 악을 악으로 보고 그것을 피하려 하며, 진리에 따라 삶을 바꾸려고 할 때 거듭남이 현실의 삶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번의 결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계속해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보게 되고, 그것을 버리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AC.29의 ‘회개의상태’는 눈물이나 감정의 강도를 말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전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이끄는 대로 살았다면, 이제는 진리를 기준으로 자기 삶을 살피고 실제로 고치기 시작합니다. 아직 불완전하고 동기도 혼합되어 있으며 선의 근원을 자기에게 돌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바로 그 상태에서 사람을 다음 단계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보면 셋째 날의 식물과 회개는 서로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씨앗이 땅에 머무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싹을 내고 자라며 열매를 맺듯이, 진리도 기억 속에 머무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변화가 AC.29에서 말하는 ‘회개의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회개를 통하여 사람은 점차 자기 선과 진리의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더 깊은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됩니다.
위 심화1의 세 번째 단계인‘tree bearing fruit,whose seed is in itself’단계,즉‘진리가 삶의 성품이 되며,선한 행동이 열매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단계에서도 여전히‘생명 없는’(inanimate)상태일 수가 있나요?
AC.29을 읽다 보면 조금 이상한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연한풀’이 돋고, ‘씨맺는채소’가 나오며, 마침내 ‘씨가진열매맺는나무’까지 등장합니다. 단순히 진리를 아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열매’까지 맺는 단계라면 상당히 깊은 거듭남에 들어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것을 아직 ‘생명없는것들’(inanimate things)이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열매를 맺고 있는데도 ‘생명없는’ 상태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AC.29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생명’을 말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생명없는’이라는 표현은 식물이 자연계에서 생물인가 무생물인가를 말하는 생물학적 구분이 아닙니다. 또한 이 단계의 사람에게 선도 진리도 전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아 무엇인가가 돋아나고 자라며 열매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을 사람이 아직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를 ‘자기에게서나오는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아직 이것을 진정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단계는 아직 ‘참된신앙의생명’을 받아들이기 전의 준비 상태입니다. 따라서 ‘열매가있느냐없느냐’만으로 생명의 유무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선한 열매가 나타나고 있어도, 사람이 그 선의 생명을 여전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있다면 AC.29의 의미에서는 아직 다음 단계의 생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전에는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반드시 되갚아 주었는데, 말씀을 배우고 회개하면서 이제는 보복하지 않으려고 애쓴다고 해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겨우 분노를 억제하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험담도 삼가고, 마침내 상대방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실제로 도와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열매’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전에는 없던 선한 행동이 실제 삶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여전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많이변했다. 예전같으면절대이렇게하지않았을텐데내가이제는저사람까지도와주었다.’ 이것이 반드시 노골적인 교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한다고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실제로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선의 근원까지 자기에게 있다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바로 이 상태에서부터 이끌어, 나중에는 자기가 행하는 모든 참된 선의 생명과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AC.29의 ‘생명없는’ 상태를 ‘가짜선’, ‘쓸모없는선’, 혹은 ‘주님께서인정하지않으시는선’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단계는 거듭남에서 반드시 필요한 준비 과정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먼저 선과 진리에 관한 것을 배우게 하시고, 그것에 따라 실제로 행동하게 하시며, 그 과정 가운데 점차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셋째 날의 식물들은 바로 이러한 준비가 실제 삶에서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씨가진열매맺는나무’라는 표현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열매가 있다는 것은 선과 진리가 단지 기억 속의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실제 삶에서 무엇인가를 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도 여전히 그 선을 자기 것으로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매맺는나무’는 셋째 날 안에서는 매우 발전한 모습이지만, 전체 거듭남의 여섯 상태를 놓고 보면 여전히 다음 단계의 생명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점은 ‘내가선을행하는가?’와 ‘그선의생명이어디에서오는가?’가 서로 다른 질문임을 보여 줍니다. 첫 번째 질문에서는 셋째 날에도 분명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악한 행동을 멈추고 선한 일을 시작하며 진리에 따라 살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에서는 아직 더 깊은 변화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안의 선과 진리를 자기 소유로 여기지 않고,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오는 것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나는아무것도하지않는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는 사람이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것이주님에게서오니나는아무것도할필요가없다’고 하는 것은 거듭남의 질서가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선택하고 싸우고 행해야 합니다. 다만 점차 깊어지는 거듭남 속에서 ‘나는주님에게서받은능력으로이렇게하고있으며, 선자체의생명은내것이아니라주님의것이다’라는 인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셋째 날의 ‘생명없음’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죽은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을 향하여 준비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씨앗은 이미 뿌려졌고, 연한 것이 돋았으며, 씨를 맺고, 마침내 열매까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직 그 모든 것의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참으로 인정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것을 ‘생명없는것들’이라고 하고, 다음에 비로소 ‘살아있는것들’이 등장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보면 ‘열매를맺는데도왜생명없는가?’라는 역설은 오히려 AC.29의 핵심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거듭남은 단지 ‘나쁜행동이좋은행동으로바뀌는것’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곳에서는 선의 근원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주님에게 있던 그 근원을 사람이 인정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내가선을행한다’고 여기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더 깊이 이끄실수록 그는 자기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셋째 날의 ‘씨가진열매맺는나무’는 결코 하찮은 단계가 아닙니다. 실제 열매가 나타나는 귀중한 회개의 상태입니다. 다만 그 열매를 바라보며 ‘이것은나의선이다’라고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를 가능하게 한 씨앗과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알아 가야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셋째 날의 준비는 다음 단계의 ‘참된신앙의생명’을 향하여 열리기 시작합니다.
AC.29의‘tender herb’,‘herb yielding seed’및‘tree bearing fruit,whose seed is in itself’에 대한 실제 예를 들어주세요.거듭남 가운데 있는 한 개인에 있어 어떤 게‘tender herb’이고,어떤 게‘herb yielding seed’인지,그리고 어떤 모습이‘tree bearing fruit,whose seed is in itself’인지 말이지요.
AC.29의 ‘연한풀’(tender herb), ‘씨맺는채소’(herb yielding seed), ‘씨가진열매맺는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는 실제 거듭남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서 어떻게 나타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세 표현을 통하여 셋째 날에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처음 싹트고 점차 자라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다만 한 가지를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 단계는 아직 거듭남이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AC.29은 이때 나타나는 것들을 아직 ‘생명없는것들’이라고 부르며, 이 사람은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실제 예도 완성된 천적·영적 인간의 모습이라기보다, 회개 가운데 선과 진리가 처음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모습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사람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평소 직장에서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동료를 몹시 싫어합니다. 상대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면 며칠 동안 분을 품고,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흠을 말하면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거나 읽는 가운데 ‘나는저사람이잘못한것만보고있는데, 내안의미움은과연옳은가?’ 하는 생각이 처음 생깁니다. 전에는 상대의 잘못만 보였는데 이제 처음으로 자기 안의 악을 조금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처음 돋아나는 것이 ‘연한풀’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아직 매우 약합니다. 그날은 ‘미워하지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상대가 다시 자기를 자극하면 곧 화가 납니다. 그래도 이전과 다른 것이 하나 생겼습니다. 전에는 자기 분노를 당연하게 여겼지만 이제는 ‘내가이사람을이렇게미워하는것이옳은가?’라는 진리가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행동 전체를 바꿀 만큼 강하지 않고, 그 진리가 자기 삶을 지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씨앗으로부터 이전에는 없던 무엇인가가 연한 싹처럼 돋아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은 말씀을 더 배우고 자신의 상태도 조금씩 살펴봅니다. 단지 ‘미워하면안된다’고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 상황에서 자기 분노를 억제하려고 합니다. 상대방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을 때 말을 멈추어 보기도 하고, 상대에게 일부러 차갑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 평소처럼 대하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실패할 때도 많지만 이제 진리가 단순히 머릿속에 머물지 않고 실제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태를 ‘씨맺는채소’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연한 풀보다 한 단계 더 진행된 것입니다. 선과 진리가 조금 더 형태를 갖추고, 사람의 실제 삶 속에서 쓰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내가참많이변했다’, ‘나는이제저사람보다훨씬나은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분노를 참은 자기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만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선한 행동이 나타난다고 해서 아직 그 선의 근원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깊이 인정하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더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의 행동에는 이전보다 분명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전에는 상대가 잘못하면 즉시 보복하거나 험담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멈추는 일이 많아집니다. 상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필요한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이라도 공정하게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마음속에서 미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미움이 행동 전체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진리가 실제 선한 행동이라는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씨가진열매맺는나무’의 한 실제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 사람이 이제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므로 이미 참된 신앙의 생명에 들어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AC.29은 오히려 이 단계에서도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셋째 날의 식물들은 아직 ‘생명없는것들’로 표현됩니다. 선한 열매가 실제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 선과 진리의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마음 깊이 인정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다음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않은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교회에서의 봉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설교를 듣다가 ‘나도어려운사람을좀도와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아직 실제 행동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을 ‘연한풀’과 같은 시작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후 그는 실제로 시간을 내어 누군가를 돕고, 자기 편의를 조금 포기하면서 봉사하기 시작합니다. 선에 관한 진리가 행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씨맺는채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선한 행동이 일회적인 감동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생활 가운데 반복되어 실제 유익을 만들어 낸다면 ‘열매맺는나무’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동기는 아직 혼합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기쁠 수도 있고, ‘나는봉사를많이하는사람’이라는 자기 만족이 있을 수도 있으며, 자기가 선한 일을 했다는 생각을 붙들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불완전한 상태 때문에 시작된 선을 모두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계속 이끄시면서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차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이 앞의 AC.25에서 살펴본 ‘꺾지않고굽히시는’ 주님의 거듭남의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따라서 ‘연한풀 → 씨맺는채소 → 씨가진열매맺는나무’를 단순히 ‘좋은생각 → 진리이해 → 완성된선한성품’이라는 세 단계로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AC.29의 중심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아 사람 안에서 처음 연약한 것이 돋아나고, 그것이 점차 더 유용한 것이 되며, 마침내 실제 열매를 맺는 데까지 나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아직 셋째 날, 곧 ‘회개의상태’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큰 위로가 됩니다. 자기 안에 겨우 ‘연한풀’ 같은 변화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악을 오늘 처음 악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면 이미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직 자주 실패하더라도 진리에 따라 실제 행동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면 그 연한 것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삶에서 실제 선한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주님께서 그 사람을 더 깊은 단계로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모든 과정에서 사람은 한 가지를 배워 가야 합니다. ‘땅’인 사람이 씨앗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땅은 씨앗을 받아 싹을 내고 열매를 맺지만, 천적 씨앗 자체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내가이렇게선해졌다’는 데 머물지 않고, 자기 안에서 나타나는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셋째 날의 식물들은 바로 그 더 깊은 생명을 향하여 자라고 있는 거듭남의 첫 열매들입니다.
눅15‘돌아온 탕자’ 비유에서도 아버지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둘째를 보살필 수 있었을 것 같은데도 그리 하지 않은 이유 역시 아래 SC.49와 같은 걸로 봐도 되나요?
네, 큰 틀에서는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다만 이 비유는 단순히 ‘섭리를 기다리셨다’는 설명을 넘어서, ‘회개와 신앙의 본질적 구조’를 드러내는 장면이기 때문에, 그 이유를 한 걸음 더 깊이 이해하시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먼저 누가복음 15장의 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은 단순한 무관심이나 방치가 아니라, ‘사랑의 방식이 ‘강제’가 아니라 ‘자유’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아들의 삶을 관리하거나 도왔다면, 아들은 여전히 자기 욕망 속에서 살면서도 고통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이야기에서는 ‘이에 스스로 돌이켜’(눅15:17)라는 결정적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외부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변화가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난 자발적 각성’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적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거듭남은 반드시 ‘자유와 이성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선을 주시고 이끄시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도록, 즉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개입하여 억지로 끌어당기는 방식은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이 너무 깊어서, 아들이 진짜로 ‘돌아오도록’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요셉 이야기에서 말씀드린 ‘재회보다 먼저 변화’라는 질서와 정확히 같은 결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고통의 역할입니다. 탕자는 돼지 치는 자리까지 내려가고, 배를 채우지 못하는 궁핍을 겪습니다. 이 과정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뒤에서 계속 돌봐주었다면, 그는 ‘멀리 떠난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어느 정도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회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아버지가 개입하지 않은 것은 방치가 아니라,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환경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 이야기에서 형제들이 기근을 겪도록 허락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 이야기에는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에서는 ‘섭리의 역사’가 중심이라면, 탕자 비유에서는 ‘아버지의 마음’이 더 전면에 드러납니다. 아버지는 보내지 않지만, 대신 ‘아직도 거리가 먼데 측은히 여겨 달려가’ 맞이합니다. 즉, ‘기다림과 환대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보내지 않는 것은 사랑의 부재가 아니라, 돌아올 때 완전히 받아주기 위한 준비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면 개입하고 싶고, 도와주고 싶고, 문제를 빨리 해결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때로 우리 생각과 다르게 나타납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 살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돌아오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도와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깊은 방식으로 돕고 계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탕자의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이유도 요셉 이야기와 같은 맥락, 곧 ‘변화를 먼저 이루시는 주님의 질서’로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덧붙이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기다림은 차가운 방관이 아니라,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된 사랑의 기다림’이라는 점입니다.